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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 둘째날 아르항가이 하라호름 유적지를 찾다

Etranger nam 2016. 6. 14. 02:12

몽골 초원 둘째날 아르항가이 하라호름 유적지

 

초원 둘째날 8월5일 아침 바양고비를 떠나 다시 초원을 달려 아르항가이 하라호름(카라코름) 유적지를 찾았다.

하라호름(karakorum성곽 유적지는 징기스칸 제국 때 만든 도시로 삼십년동안 수도로 정하였던 곳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후에는 실크로드 교역이 활발해 위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유목민인 몽골인들이 성을 만들었던 이례적인 곳인만큼 몽골인들에게는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하는 곳이다.

특이하게도 하라호름은 성곽이 높지도 않고 배후를 위한 산이나 방어를 위한 해자도 없는 평지 성이다.

즉 방어용 성곽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몰골인들은 성곽을 이용한 공성전을 하지 않는다.

들은 드넓은 초원으로 나아가 공격중심의 전투를 하는 민족이다.

 

청나라에 의해 페허가 되었던 성 터에 지금은 라마교 사원 에르덴죠가 들어서 있다. 

 

 

바양고비를 떠나는 아침, 숙소 여직원들과 기사 몬다그와 함께

 

초원은 또 다시 펼쳐진다.

 

유목민들의 게르 마을에는 말과 자동차, 태양열 발전기 등이 갖추어져 있다. 

 

 

 

몽골여행 중 필히 만나게 되는 어워(OVOO), 우리네 성황당쯤 되는 샤머니즘의 흔적

 

초원에는 곳곳에 이러한 불탑들도 보인다.

 

드넓은 초원과 엄청난 수의 양, 야크, 염소, 말들이 조화롭게 방목되고 있다.

 

 

 

 

 

먼 지평선 아래 가축군들, 웬일인지 쌍봉 낙타 한마리가 홀로 떨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초원에도 지하자원을 파내는 듯한 산업시설도 가끔 보인다

 

 

징기스칸 시대의 수도 하라호른이 나타났다. 몽골인들이 만든 최초의 도시 유적이라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사방 400M 성벽 안에 라마불교 사원 에르덴죠가 자리잡고 있다.

 

 

 

사방 성벽은 하얀 불탑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마교 사원 에르덴죠의 불상과 탱화

 

 

 

티벳 건축 양식의 건물들도 보인다 이 곳에는 80여명의 승려들이 수행 정진중이라고 한다

 

 

하라호른 유적지 인근 상가와 마을이 한가롭다

 

작은 시장이 있어서 인근 유목민들이 아이락, 말린 치즈, 요쿠르트바 등을 팔고 생필품을 구매하는 곳이다 

 

유목민 매대에서는 신선한 유제품들을 구할 수 있다.

 

생필품을 취급하는 작은 수퍼(?)

 

 

 

자동차와 당나귀 수레가 공존하는 현장이 재미있다

 

 

마을 뒤 언덕에는 징기스칸을 기리는 조형물이 있다

 

 

 

이 드넓은 초원과 물길이 이 곳 하라호름을 수도로 정한 듯 싶다,

 

물길 아름다운 시냇가에서 몬다그 기사, 통역겸 가이드 오뜩어양과 함께한 라면의 맛이 일품이다.

 

 

 

하라호름의 성곽 유적지. 징기스칸 제국 때 삼십년동안 수도를 하였던 곳.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후에는 실크로드 교역이 활발해 위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성을 만들게 했던 이례적인 곳인만큼 몽골인들에게는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하는 곳이다. 울란바토르에서 370KM 이지만 자동차로 7시간 걸린다

 

몽골제국의 최초의 수도를 두고 두가지 의문이 있었다. 하나는 하라호른을 최초의 수도로 정한 사람이 누구이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위치와 규모는 어디였으며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하라호름을 몽골제국의 최초의 수도로 정한 사람이 칭키스칸이었다는 견해도 있었고, 칭키스칸의 세째 아들로서 칭키스칸의 후계자였던 오고데이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전자의 견해에 의하면, 칭키스칸이 1220년에 하라호른을 몽골제국의 최초의 수도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1346년의 기록에 의거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이 당시 칭키스칸은 그의 네 아들들을 데리고 서방원정중이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견해에 의하면, 하라호름을 몽골제국의 최초의 수도로 결정한 사람은 오고데이이며, 그 시기는 금나라 정벌이 끝나고 난 다음인 1235년이라는 것이다. 즉 금나라 정복이 끝나고 난 다음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수도의 필요성 때문에 오고데이가 하라호른을 수도로 결정하고 궁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고, 지금은 후자의 견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고데이가 하라호름을 수도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보다 두가지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울루스와 가깝고, 동시에 무엇보다 하라호른 일대가 톨루이의 울루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다시말하여 톨루이를 견제하고 그의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와해시키기 위하여서 하라호름을 제국의 수도로 결정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목경제구조아래에서 하라호른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몽골에서는 막내아들이 부모재산을 상속받는다. 칭키스칸은 정처에게서 네명의 아들을 보았는 데, 그 네 아들이 바로 유명한 주찌, 차가타이, 오고데이, 톨루이이다. 몽골의 관습대로 톨루이가 칭키스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칭키스칸 직속군사는 십이만구천명이었다. 칭키스칸은 이것을 주찌(주찌는 나이 사십에 아버지인 칭키스칸에 의하여 독살되었다.)와 차가타이, 오고데이 그리고 서자인 쿨겐에게 각각 사천명씩을 나누어주고(만육천명), 그의 어머니인 호엘룬을 비롯한 동생 조카등에게 만이천명을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톨루이에게 주었다(십만 천명). 칭키스칸의 천막과 직영목지 역시 톨루이가 상속을 받았다.

 

칭키스칸의 사후 톨루이의 존재는 오고데이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후계자 지명과정에서의 앙금(주찌와 차가타이의 대립)과 함께 주찌가와 톨루이가가 한편이 되고, 오고데이가와 차가타이가가 한편이 되는 분열양상이 오고데이 치세시에 노출이 되기도 하였다.(주찌와 톨루이는 형제간이면서도 동시에 동서간이라는 점에 유의하도록 하자.)(이것이 오고데이의 서장자 구육의 사후 오고데이가가 황실계보에서 멀어지고, 톨루이가가 황실계보를 이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동시에 몽골제국이 분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데, 카이두 반란이 좋은 예이다. 톨루이가가 황실계보를 장악하게 되는 출발은 톨루이의 장자인 멍케가 주찌의 둘째 아들인 바투의 지원에 힘입어 대칸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투와 멍케의 연합은 멍케의 어머니인 소르콕타니 베키에 의하여 실현이 되었는 데, 소르콕타니 베키는 바투에게는 이모이기도 하다.)

 

여기에 금나라 정복과정에서 톨루이가 큰 공을 세워서 톨루이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자, 오고데이는 톨루이에게 자진할 것을 요구하고, 톨루이는 오고데이의 뜻에 따라 자진한다. 톨루이가 자살을 한 다음 오고데이는 톨루이가의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더욱 와해시키기 위하여 톨루이의 정처인 소르콕타니 베키와 그의 서장자인 구육과의 결혼을 추진하나 소르콕타니 베키가 강력하게 거절하였다.(소르콕타니 베키는 어떤 면에서는 칭키스칸의 어머니인 호엘룬보다 높은 평가와 대접을 받았는 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호엘룬이 나중에 뭉릭에치게와 재혼을 하였는 데 반하여, 소르콕타니 베키는 정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소르콕타니 베키에 대한 제사는 토곤테무르시절까지 이어졌다.)

 

오고데이가 칭키스칸에 의하여 후계자로 지명이 되었으나, 오고데이의 정치적인 기반은 생각보다 취약하였던 것 같다. 그 근거는 다음 두가지 사실에서 추론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칭키스칸 사후 오고데이의 정치적인 기반은 차가타이와의 협력을 통하여서만 확보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방원정군을 편성할 때, 주찌의 둘째 아들인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할 수 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에서 볼 수가 있다.

 

서방원정중 오고데이의 서장자인 구육과 바투가 다투었을 때, 오고데이가 처벌을 전제로 구육을 소환하게 되는 데, 이 때 구육을 감시하면서 소환하였던 당사자가 멍케였다. 구육이 소환되는 과정에서 오고데이가 서거하게 되는 데, 소환중이었던 구육이 대칸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생모이자 오고데이의 제육황후였던 투르게네의 지원 때문이었다.9구육이 오고데이를 이어 대칸위에 오르는 데 거의 사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라호름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특성으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일대만한 목초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에게는 물과 목초지가 생명인 데. 하라호른 일대에는 어르헝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골고원에서는 드물게 물 많고, 강 많고, 나무 많고, 양질의 풀이 많은 곳이다. 지금도 아르항가이 일원 특히 동남부 아르항가이의 경우 유목민들의 전통적인 삶이 녹아나 있는 이유는 바로 자연적인 조건이 유목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라호름의 성터는 20세기 중반 러시아의 키실료프 조사대의 발굴에 의하여 확인이 되었다. 이 조사대의 보고에 의하면, 하라호름 성벽은 남북으로 2500메터, 동서로 1500메터에 이르는 장방형이었으며, 하라호름 성 서남쪽에 이른바 우구데이 궁전이라고 하는 만안궁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는 데, 만안궁은 흙과 모래를 번갈아 쌓아올려서 지면보다 약간 높은 곳에 건축되었다고 하며 그 규모는 남북이 120메터이고, 동서가 80메터였다고 한다.

 

루브룩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하라호름 성은 토성이었다고 하며, 만안궁을 제외하면, 하라호름 성 자체는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하라호른 성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하는 데, 사라센 구역과 중국 구역이 그것이다.

사라센 구역은 대칸의 궁장과 근접한 곳에 있기도 하여 사신도 많았고, 다수의 상인들이 그곳으로 모였다고 하며, 중국구역의 중국인들은 모두 직인이었다고 하였다.

 

하라호름 성에는 네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는 데, 동쪽 문앞에서는 기장과 곡식등이 거래가 되었고, 서쪽 문앞에서는 양과 염소가 거래가 되었으며, 남쪽 문앞에서는 소와 수레가 거래가 되었으며, 북쪽 문앞에서는 말이 거래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라호름 성벽 서남쪽에 자리한 만안궁은 벽돌로 쌓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거기에도 문이 네개 있었다고 하였다. 주베이니의 기록에 의하면, 네개의 문가운데 하나는 대칸의 전용문이었고, 또 하나는 대칸의 일족이 사용하는 전용문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공주들의 전용문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평민들을 위한 문이었다고 하였다.

만안궁 자체는 바닥도 타일을 깔았을 정도로 화려하였으나, 궁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던 이유는 오고데이가 하라호른을 제국의 수도로 결정하여 궁과 성벽을 지었으면서도 그 자신 유목민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런 경향은 쿠빌라이(쿠빌라이는 톨루이의 둘째 아들이다.)가 대도와 상도를 두고 여름에는 상도에서 보내고 겨울에는 대도에서 보냈던 데에서도 볼 수가 있다.상도와 대도사이의 거리는 약 삼백킬로메터에 이르는 데.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20일에서 25일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중간 중간에 納鉢이라는 기착지가 여러군데 있었다고 하였다. 원나라시대에 황제가 상도에서 대도로, 대도에서 상도로 이동을 할 때 보통 십만여명이 이동하였다고 한다.)

 

하라호름은 오고데이가 수도로 정한 다음 거의 사십년 동안 제국의 수도로서 기능을 수행하다가 아릭부케(톨루이의 막내아들)가 쿠빌라이에게 항복을 하고 난 다음 수도로서의 기능과 역활을 상실하게 되었다.

몽골계통의 칸들은 한군데에 정착하여서 생활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성과 궁전을 지어놓고도 천막에서 이동생활을 하였다. 칸들이 머무는 천막을 오르두(ordu)라고 한다.

 

대칸 오고데이의 계절이동은 대략 다음과 같이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봄 즉 321일에서 421일경까지는 만안궁에 머물렀고, 이후 40여일간은 하라호른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머물렀다고 하는 데, 이곳에는 오고데이의 명령으로 전각까지 지었다고 하였다(이 전각의 이름이 掃隣城이다.(소린은 거처라는 의미를 지닌 몽골어 사우린을 옮긴 말이다.) 소린성은 추정하건대, 위구르제국의 수도였던 카라발가순 근처인 것으로 보고 있다.)

 

유월초가 되면 다시 만안궁에서 잠시 지내다가, 하라호른에서 동쪽으로 며칠간 거리에 있는 투즈구 발리크에서 약 한달가량 머물렀다고 하는 데, 투즈구 발리크는 투르크어인 데, 투즈구는 여행자에게 대접하는 음식을 이름이고, 발리크는 도시를 의미한다고 한다칠월이 되면 투즈구발리크에서 동남쪽 아래에 있는 우르멕투 초원에 있는 시라오르두에서 지냈다고 하는 데, 시라오르두는 황금빛의 천막이라는 의미인 데, 카르피니의 기록에 의하면 천막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2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라오르두에 821일까지 머물다가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쿠케 나우르라는 호수 근처에서 40일 정도 체류하였다가 10월 초가 되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 옹긴 강 근처에서 겨울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2월말경이 되면 다시 북상하여 투즈구발리크를 거쳐 하라호른의 만안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몽골의 대 칸들이나, 몽골계통의 칸들의 외교문서를 비롯한 칙령을 보면 이 명령서를 어디어디에서 썻노라고 명기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이 정주형의 수도를 정하여 놓은 다음에도 끊임없이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