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궤도 전차(軌道電車)의 향수
남일재(동서대학교 교수, 사. 한국지역사회연구소 소장)
부산지역의 도시 건설사에서 궤도 전차(軌道電車)를 빼고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126년전인 1890년 5월 4일 오후 3시 서울 장안을 온통 술렁이게 하며 동대문과 흥화문(전 서울고 자리) 간에로 전기를 먹는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한 20여년 후 부산에서도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부산의 궤도 전차는 1909년 6월 29일 당시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설립한 부산궤도주식회사가 한국정부 내무대신으로부터 궤도부설의 특허를 받았고, 다음해인 1910년 3월 7일에는 다시 부산진~동래간 약 9.3km에 대한 궤도운수 허가를 받아 동년 11월 22일부터 실제업무를 개시한 바, 증기기관차 2대와 객차12량으로 운행했다. 이것이 전차의 전신인 경편철도였으니 지금부터 107년전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전기를 이용한 전차가 운행되기는 1915년 11월부터였다. 그 동안 궤도가 증설되고 동래선을 제외한 시내선이 복선으로 되는 등 발전을 하게 되었지만 전차를 운행하는 회사는 부산궤도주식회사에서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朝鮮瓦斯電氣株式會社)와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南鮮合同電氣株式會社)를 거쳐 오늘의 한국전력으로 바뀌어 왔다.
부산궤도주식회사는 1915년 5월 19일 그 권리 일체를 역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에 양도하였으며, 전차 부설은 동년 12월 먼저 부산진 ~ 초량간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초량 ~ 부산우체국 앞으로 연장되었고, 부산진~ 동래간은 궤폭을 2척5촌(2尺5寸)으로 넓혀서 시공하였다. 1915년 10월 31일 개통식을 하게 되어 동년 11월 1일에 운행을 개시하게 됨으로써 부산~동래간에 전차가 운행되었던 것이다.
이후 전차선로는 계속 확장되어 1916년 9월 22일 부터는 부산우체국 옆에서 대청동~보수동~현 토성교를 지나 토성동에 이르는 선로가 개통되었고, 1917년 12월 19일 부터는 다시 우체국앞에서 중앙동 광복동 거리를 지나 현 한전 부산지사(현 서면 한국전력공사 부산울산지역본부) 앞에 이르는 선로가 개통되었다.
1924년 4월에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부산역전~부산진 입구간의 단선을 복선으로 변경하여 동년 9월에 완성하고, 1925년 9월에는 보수동에서 도청앞에 이르는 단선을 연장하였다. 1926년 상반기에는 궤철 45폰드, 25폰드를 전부 60폰드로 바꾸고 동시에 나무다리를 전부 철교로 교체하였으며 1927년 2월까지 재래의 소형전차를 일본에서 수입한 반강철제전차(半鋼鐵製電車)로 전부 대체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동래선은 종점에서 온천장까지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므로 승객의 불편이 많았다. 따라서 1927년 10월 말에 온천장역을 신축하여 선로를 이곳까지 연장하였다. 단기 온천장역은 현 부산은행 온천동지점 자리이며, 온천장역 앞에 전차 개통 기념으로 세워졌던 모자 쓴 할아버지상은 현재 농심관광호텔 정문에 보존되어 있다.
한편 대신동 선로는 공설운동장이 개설되었으므로 1928년 6월에 대신동선의 연장 허가를 받게 되어 즉시 공사에 착수, 동년 9월말에 준공 개통하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역전 이남의 시내전차 선로는 광복동선과 대청동선이 보수동에서 연결되어 대신동선으로 연장된 셈이다. 한편 종래의 궤폭 2척6촌을 3척6촌의 표준궤도로 개수하기 위하여 1931년 10월에는 전 궤도를 3척 6촌의 표준궤도로 개량하고, 1934년 9월에는 부평동 시장통의 선로를 철폐하고 간선도로에 공설운동장에 이르는 선로를 복선으로 부설했다.
당시 부산의 가장 큰 사업인 간선도로와 구 부산대교(현 영도대교)의 개통․도로포장의 실현에 따라 중앙동의 구선로를 폐지하여 간선도로에 복선을 부설, 동년 11월말에 완공하였다. 이로써 중앙동, 광복동선과 대청동선의 양선을 제외한 공설운동장~부산진간의 선로가 복선으로 되었으며, 이후 1935년 2월에는 중앙동에서 분기하여 영도에 이르는 영도선이 연장되었다. 당시 부산의 전차선로는 범일동선 3.979KM, 영도선 1.966KM, 광복동선 3.376KM 대청동선 1.488KM, 동래선 10.906KM로 총계 21.717KM가 되었다. 그후 광복동선을 철폐하여 충무로선이 신설된 이외에는 별로 노선의 변동이 없었다. 다만 대청동선은 해방이후로 운휴되어 오던 중 철폐되었다.
부산에 처음 전차가 나타날 때만하더라도 고작 벼슬아치들이나 타고 다니는 가마와 노새가 있을 뿐 인력거조차 없었다. 그로부터 약25년 뒤 하이야(ハイヤ、hire)로 불리던 전세택시와 버스가 나타났지만 그것도 몇 대 뿐으로 시민의 교통수단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무렵의 부산인구는 10만 내외로 한국인 6만, 일본인이 4만 정도로서. 처음 부산진에서 동래온천장까지 궤도를 놓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인 관광객들이나 여행자들이 동래 온천장으로 가기위한 교통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범천동「로터리」를 넘어 동래읍 까지는 모두가 논밭이었으며 충무동 남포동 일대도 개펄지대에 불과했고, 일본인들은 용두산 주변일대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나들이할 때는 「택시」회사에 전화로 연락하여 대절을 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인들은 동래고보(현 동래고교)․부산제2상(현 부산상고) 학생들이 통학을 할 때나 또 한양들이 주로 타고 다녔지 일반인들은 별로 전차를 이용하지 않았고 걸어다녔다.
5일마다 부산진시장에 나갈 때도 동래사람들은 대부분 짐을 이고 걸어다녔다. 그래서 텅텅 비어 다니는 전차는 여행하는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장에 투숙하러 갈 때나 한국인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갈 때 이용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전차를 「로맨스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동래읍의 한양들이 피서 삼아 전차를 타기도 하여 「피서차」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모시옷에 부채를 든 한양들이 전차를 타고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낮잠을 즐기면서 구 부산역 앞까지 왔다 다시 동래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한가지 이채로 왔던 것은 그때 영주동에 집결해있던 기생들이 유명했던 초량 부근의 요정(현재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난각을 말하는 듯)에 불려 나갈 때면 거리의 희롱꾼들을 피하기 위해 이 전차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서민들이 전차를 타지 않았던 주요한 까닭은 동래온천장에서 부산까지의 6구간 요금 30전이면 막걸리 5되를 마실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던 것이다.
그후 인구가 30만 가량으로 늘어난 1945년 광복 이후에야 비로소 전차는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전차를 타려는 사람이 밀려들어 순서에 따라 팔에 도장까지 받으며 몇 시간씩 기다리게 되면서부터 옛날의 귀족전차는 서민전차로 전락하였고, 전차속엔 소매치기가 붐비기까지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 후 전차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의 인구가 1백만명 이상으로 급증하면서 교통난이 심해지자 서면~온천장, 서면 ~ 공설운동장, 서면 ~ 영도간 등 4개 노선에 모두 40여대의 전차가 투입되는 등 부산의 대중교통에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1963년 이르러는 하루 평균 12만 여명의 승객을 수송하기까지 하던 전차는 버스와 택시의 대중 수송 분담율이 늘어난 데다 도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서울보다 먼저 1968년 5월 20일 운행이 중단되었던 것이다.(서울의 전차는 동년 11월 30일 퇴역하였다.)
노새를 타고, 가마를 타고 옛날 부산사람들이 처음 전차를 타게된 이후 전차는 그지없이 소중한 교통수단으로 생각되었겠지만, 60여년간 부산시민의 발이 되어온 뒤 전차가 오히려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렇게 퇴역한 부산 전차의 추억은 대신동 구 전차종점 자리에 기념비로서 남아있다. 이 기념비에는 『이곳은 일찍이 부산 시민들이 대중교통수단으로 즐겨 이용하였던 전차종점으로 아직도 우리 시민의 마음속에 당시의 추억과 낭만이 깃들어 있으며 이것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합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당시 운행되던 전차 실물이 부산시립박물관과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에 각각 1량씩 보존돼 있다.
(2000년 7월 작성, 2016. 08. 03 수정)
참고자료 : 부산일보 기사 (1968년 5월) / 한국전력 보관 자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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