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낸 청소년기
방황과 타락의 한 자락이 삶의 또 다른 힘이었을까?
남 일 재(동서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왜 나 같은 사람의 청소년기를 신문에 실어야 하는 것일까? 역경을 딛고 입지전적인 일을 한 바도 전혀 없고, 상 한번 제대로 받아본 일이나 자랑할 만한 업적도 거의 없으며, 공부하기 싫어서 가출이나 일삼던 말썽쟁이 청소년기를 회고한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1965년, 시험으로 중학교에 겨우 입학하였던 나는 곧 비행청소년의 길로 들어섰다. 학업 성적은 전교 꼴찌 수준을 달리었고, 무단결석과 가출을 일삼았으며 비슷한 처지의 여학생들과 어울려 극장가를 전전했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K라는 친구의 가출 여비를 만들어 준다며 야외전축을 들고 팔러 나간 것을 시작으로, 서너 차례 가출을 시도했던 나는 아버님의 신고에 의해 절도혐의로 경찰서에 유치되기도 했었다. 용호동 이기대 바닷가, 범일동 조방 앞 골목의 쪽방 여인숙, 구마산 동보극장 앞 등이 당시 나의 행적에서 기억나는 장소들이다. 15살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워 물고 대낮부터 소주잔을 들이키며 거리와 바닷가를 배회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혹 우리 아들이 나를 닮지나 않을까 끔직하기만 하다.
이러던 내가 지금 대학교수가 되었고, 상당기간 교양 윤리를 강의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로부터 말도 안 되는 사무착오(?)라며 강력하게 이의제기를 받는 수모를 지금도 당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변하게 하였고 지금 이처럼 안정된 삶을 살게 한 것일까? 몇 가지 요인을 스스로 찾아내어 본다.
첫째, 부모님의 끝없는 관심과 사랑이었다. 가출한 아들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으면서도, 발견 즉시 경찰서 유치를 결정하신 단호함을 보여 주심으로 절대 잘못된 일과 타협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방법을 보여주신 일이다.
둘째, 신앙생활의 회복이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된 교회생활을 다시 회복한 일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셋째, 비 명문 고교로의 진학이었다. 비평준화 시절 고교 간 격차는 너무도 컸다. 만약 명문고교를 의식하여 재수를 택하였더라면 아마도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문 고교를 향한 재수를 포기하고 비 명문 고교를 택하여 성적의 열세를 조금이라도 극복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어리고도 이른 나이에 잠깐 방황과 타락의 한 자락을 경험한 것이 후일 삶의 한 축에서 나를 받혀주는 또 다른 힘이 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교회의 장로로서, 대학의 선생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들과 제자들을 향해 인생을 논하면서, 지난 청소년기의 한 장면들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싶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내가 어린 나이에 방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고교시절 또는 대학시절, 아니면 사회생활의 한 중간 언젠가 쯤에서 그 때의 방황보다 더 큰 방황과 아픔을 겪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자답하며
나름대로 위안을 삼는다. (부산일보 2005/09/09 030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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