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무대, 에베소(Ephesus) 교회를 찾아 나서다
에베소(Ephesus). 사도 바울의 선교무대였고,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가 있던 고대도시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에베소 유적지는 터키 서남부지역 에게해 부근 이즈미르주의 셀죽 지역에 있다.
BC. 7-6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의해 식민도시로 건립된 에베소는 주변 국가인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들의 식민통치를 받는 역사가 반복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베소는 해상무역과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유한 도시였다.
에베소의 대표적 유적, 셀수스 도서관 / 사도 바울이 이용한 두란노 서원이 이곳이라 여겨진다.
지금의 에베소 유적지는 BC. 3세기경,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리시마우스 장군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BC. 1050년경 그리스 이주민들이 고대 항구도시 에베소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최고의 황금기를 누린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주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도시로서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는 인구가 20만명을 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당시 에베소는 비옥한 평야이자 동서양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무역의 도시이자 유행과 향락의 도시로서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음악당, 목욕탕, 여관, 셀수스 도서관(두란노서원)에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알려진 아데미 신전 등이 있었던 대도시였다. 특히 에베소는 AD.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도시로, 사도 바울이 세번씩이나 전도여행을 하였고 제3차 선교여행 때에는 2년이나 머물며 두란노서원 등에서 열변을 토하며 사역을 하였던 중요한 곳이다.
누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고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가 감독으로 목회하였고 순교한 교회가 에베소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태풍 등으로 인한 퇴적작용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고대 도시 에베소의 영화는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도시가 되었다. 에베소 유적지는 현재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약 30% 정도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에베소 탐방은 누가의 묘로부터 시작한다. 한글 안내문이 반갑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다.
누가의 무덤(Luke's Grave)은 1,860년에 영국의 고고학자가 비석의 황소 머리를 보고 황소복음(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의 묘'로 확정하였다고 한다.
에베소 안내도
바리우스(Varius) 공중목욕탕 터/ 3개의 아치형 문으로 냉온탕, 사우나까지 있었다고 한다
1400석 규모의 작은 음악당 오데이온(odeion) 원래는 지붕있는 실내 반원형 소극장으로 공연과 회의용이었다.
오데이온은 AD 150년경에 귀족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피아나(Flavia Papiana)에 의해 세워졌다는 명문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인터넷 자료사진)
오데이온에 앉아 보았다. 무대 음향이 아주 좋다. 오데이온은 오디오(AUDIO)의 어원으로 알려진다.
오데이온 앞 아고라에는 익투스 기호가 있다.
익투스ΙΧΘΥΣ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하며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암호성 기호였다.
예수Ἰησοῦς(이에수스) 그리스도Χριστός(크리스토스) 하나님의Θεοῦ(세우) 아들Υἱός(휘오스) 구원자Σωτήρ(쏘테르) 의 첫글자를 모으면 익투스ΙΧΘΥΣ가 된다. 즉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 기호로 익투스의 모든 자모를 표기할 수 있다.
오데이온 앞 바실리카(Basilica)와 광장(Agora)
바실리카는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회장소, 때로는 궁정 등에도 사용된 직사각형 평면의 공공건축을 말한다. 오데온 앞에는 바실리카의 기둥들이 길게 열을 지어 있다. 바실리카 앞에는 광장, 즉 아고라가 있다.
셀수스도서관 뒤 대리석 길의 ‘아고라’가 상업광장(Commercial Agora)이라면 이곳의 아고라는 국가아고라(state agora)다.
정치적, 종교적인 회합이 열렸던 장소다. AD 1세기에 건립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AD 379-395) 시기에 마지막으로 개축되었다.
오데이온 옆에는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있다. 프리타네이온은 도시의 행정기관, 즉 시청이 있는 곳으로 회의가 열리고 손님을 접견하던 장소이다. BC.3세기경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폴리오 기념관(Pollio Mounment)과 샘 아치의 뒷면 그리고 도미티안 신전의 상층부 일부가 보인다.
도미티안 신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전이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정책이었다.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사도 요한이 황제 숭배를 거부하자 밧모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폴리오 기념관과 샘
도미티안 신전, 폴리오 기념관, 메미우스 기념비 일대를 도미티아누스 광장이라고 한다
메미우스 기념비(Memmius Monument) 메미우스는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었던 술라(Sulla)의 손자다
죽은자도 살린다는 의학의 반신반인, 아스클레피온의 뱀 지팡이
저승사자 헤르메스의 부조
승리와 행운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 /
헤라크레스 문을 장식하고 있었던 조형물인데 왼손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들고 있고 오른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나이키 회사의 로고가 이 니케 여신의 날개 또는 옷자락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헤라크레스의 문 - 도로 가운데 기둥 폭을 좁게 세웠다. 원래는 기둥 6개의 3층 구조물이었다고 한다.
기둥에는 사자 가죽을 입고 있는 헤라크레스가 부조되어 있다.
헤라크레스 문으로 부터 쿠레테스 거리 (Curetes Street)가 시작된다.
쿠레테스 거리 아래 셀수스 도서관이 보인다
거리에는 석관들이 여러개 나와 있다.
트라야누스 샘(Fountain of Trajanus)
발굴된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쿠레테스 길 북쪽 끝에 위치한 이 샘은 AD 102년~114년에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를 위해 세워졌다.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샘으로 중앙 받침대 위에 서 있던 12m 높이의 황제 동상 발목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됐다.
물은 수로를 통해 귀족계층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됐다고 한다. 지금은 받침대와 동상의 오른 발만이 남아 있다.
언덕위의 귀족의 주택들 수천 집들 중 일부만 발굴 복원되어 있다.
거리 바닥이 정교한 모자이크로 포장되어 있다. 귀족 동네라서 그런지...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Scholastica Bath)
이 건물은 스콜라스티카라는 여성이 귀족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진으로 파괴된 공중목욕탕을 재건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남성들의 취향에 맞게 냉온탕과 탈의실을 갖추고 모임 장소도 만들었으며, 목욕탕에서 사용된 물을 이용해 그 아래에 유료 수세식 공중화장실을 만들어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1 세기에 지어져서 4 세기까지 계속되는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졌고 그때마다 다시 수리되어 오면서 형태가 조금씩 바뀌었다.
하드리아누스(Hadrianus)신전 / AD.2C 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건물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앞 아치에는 니케 여신이, 뒤 반원형 벽에는 메두사가 부조되어 있다.
메두사 부조
니케 여신 부조
인근에 십자가 부조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에베소 교회 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공중 화장실 (Latrines) /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왼쪽에 있는 공중 화장실은 가운데 사각형의 물고임이 있고, 그 둘레에 대리석 변기와 작은 수로가 있다. 이 화장실은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고 화장실의 바닥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수로를 통하여 깨끗한 물이 항상 흐르도록 설치하여 놓았다. 공중 화장실은 공중 목욕탕인 스콜라스티카 목욕탕보다 낮은 지대에 만들었는데 공중 목욕탕에서 쓰고 난 더운 물과 찬물이 공중 화장실로 흐르게 하여 수세식으로 뒤처리를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에베소 창녀촌 유적 / 공중 화장실 아래 셀수스 도서관 앞 원형극장으로 가는 길바닥 대리석판에 여자 얼굴과 돈 및 발자국 하나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인근 지역 창녀촌의 굉고라고 한다. 여자와 돈은 여자를 만나려면 돈을 갖고 와야 한다는 것이고 발자국은 자기의 발을 대어보고 그 발보다 크면 여자를 살 수 있다는 암시로서 2,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광고판인 셈이다.
셀수스 도서관 /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이다.
소 아시아주의 총독 쥴리우스 셀수스가 으로 114년에 70세로 죽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1층은 이오니아식이고, 2층은 코린트 양식 건물로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대 건축물의 최고봉이란 찬사를 받기도 한다. 건물을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 조각들이 대단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지혜, 미덕, 지성 그리고 지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신상들의 석상이 있다. 모두 재현품이며 진품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사도 바울이 이용한 두란노 서원이 이곳이라 여겨진다.
wisdom(sophia지혜)/virtue(arete미덕)/ intelligence(ennoia지성)/ knowledge(episteme지식)의 여신상들
셀수스도서관에서 오른쪽 원형극장으로 나가는 문이 참 아름답다.
도서관을 지나 원형극장에 이르는 길에는 거대한 상업 아고라 유적이 펼쳐진다. 항구로 이어지는 길목인 때문이다.
원형극장 / BC 3C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된 후 세기 로마시대에 대대적으로 증축 되었으며,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객석은 지름 154m, 높이 38m인 반원형 구조이다.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지어진 이 곳에서 각종 연극과 문화예술 공연이 있었고, 로마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혈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초사도 바울 등 초기 기독교인들과 아르테미스 신자들의 논쟁도 이 곳에서 행해졌으며, 그 결과로 사도 바울은 언덕위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나중에는 에베소에서 추방되었다.
원형극장 전경 (사진 3장 합성)
원형극장과 상업 아고라 유적 일대
원형극장 (아래 인터넷 자료사진)
지금은 메워져 항구의 기능을 잃었지만 고대 에베소 항구로 이어지는 '아카디우스 거리', '항만도로' 라고도 부른다.
에베소는 고대 소아시아 지역의 항구도시로서 당시 세계적인 무역도시 기능을 한 로마의 전형적인 계획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원형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아카디우스 거리는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 졌으며, 아카디우스 황제(AD 395~408)시대에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있다. 폭 11m, 길이 530m의 도로
'터키 그리스 여행 > 파묵칼레와 7대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묵칼레(Pamukkale) 노천온천과 히에라폴리스 유적 (0) | 2016.03.20 |
---|---|
소아시아 버가모교회, 서머나 교회 유적을 찾아서 (0) | 2015.10.14 |
소아시아 두아디라 교회 터를 찾아 악히사르(AKHISAR)로 가다 (0) | 2015.10.14 |
소아시아 빌라델피아, 사데 교회 유적터를 찾아서 (0) | 2015.10.13 |
미지근한 신앙 터키 라오디게아 교회 (0) | 2015.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