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 두아디라 교회 터를 찾아 악히사르(AKHISAR)로 가다
두아디라 교회 유적 터, 현지명은 악히사르(AKHISAR)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B.C.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중 셀레우코스가 이 지역을 점령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두아디라 즉 "티아(Thya)의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 군대의 주둔만 가지고는 살아있는 도시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으로 이 도시를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다. 그래서 이곳에 많은 상인조합(길드)이 있었다.
염색 조합, 직조 조합, 제빵 조합, 도기 조합, 제혁 조합, 대장장이 조합 등, 이러한 길드조합은 두아디라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자신의 업종과 관련된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생계에 지장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길드마다 각각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어서 길드의 활동 자체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임을 가질 때는 각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먹는 식사와 각종 음란한 행사들이 이어졌다. 생계를 위해서는 길드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길드의 의식을 함께해야 하는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쉽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났다고 하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Rydya)는 이 도시 출신이다. 이 여자는 자주장사였는데, 자주는 진홍색의 양모나 아마포로서 달팽이로부터 뽑아낸 물감으로 염색하는데 너무 비싸기 때문에 황제만 이 물감으로 염색된 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라고 칭찬 한 후 이사벨을 비유해서 교회의 신도들을 책망하고 있다. 이 당시 두아디라에 만연한 "삼바데"라고 불리우는 여자무당의 숭배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악히사르(AKHISAR)라는 한적한 도시 속 주택가에 페허로 남아 있는 두아디라 교회 터.
역시 석조 기둥 몇개와 발굴 석조 유물들이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벽채가 일부 남아 있어 교회인가 싶기도 하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석조 유물들
빌라델피아 처럼 이곳도 인근 아파트 단지와 이웃하며 지낸다
감사기도를 드리고 버가모 교회로 향했다.
악히사르(AKHISAR)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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