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만리성을 쌓는다고 했던가? 신선 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어느 쪽이든 나는 오늘 이시간, 단숨에 몇년치 아름다운 삶의 교류를 훔쳐보았고, 멋으로 가득찬 새로운 지식에 대취하여 황홀하기만하다. 이도 어쩜 한 인연 아니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24일 금요일 밤 습관처럼 노트북을 열었다.
어설픈 나의 개인 홈페이지에 마음대로 달아놓은 배너하나 (막사발 하나에 고미술품 감상이라고 쓴 이 배너는 물론 고미술네트워크 바로가기이다)를 두드리다가 짙게 익어가는 이 가을 밤을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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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품에 대한 일 식견도 없고 애정도 없으면서 그저 겉 멋으로 달아놓은 이 배너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문이 된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우연히 보았던 막사발의 매력이 나를 끌어 인터넷을 뒤지게 하였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보기 위해 이 배너를 달았던 것이 아마 수년전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도자기 사진이나 보고 가격이 얼마인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힐끗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도대체가 남의 글 읽는데는 관대하지 아니한 시건방진 버릇이 긴 세월 나를 무지와 편견의 늪에 방치하여 놓았던 것이다.
고미술이란 용어의 정의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특히 도자기에 대해서는 상감청자, 청화백자, 분청사기 세마디만 가지고 그림이나 쳐다보면서 그저 '좋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 나에게 편고재 주인 어른의 글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고 도자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하였다.
한편 한편 편고재 주인을 따라 과거로 가는 여행 길에 진주사는 정헌철 교수님를 만났고 두분 사이의 아름다운 대화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강한 내공이 묻어나는 해박한 지식과 삶에 대한 뜨거운 정열이 어우러지는 대화를 옅들으면서 내내 부러운 마음 금할길 없다.
이런 만남, 이런 대화가 있는데 열두밤 새우며 대작하는 일이 뭐 그리 힘들까? 아니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해도 모퉁이에 앉아 귀동양하는 재미는 또 얼마나 쏠쏠할까?
72년 벽두 대학시험 후 혹 청계천에서 스쳐지났을 수도 있는 동년배 정교수님은 어쩌면 그렇게도 풍부하고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하셨는지? 어찌 그리 한점 한점 기가막힌 보물들을 소장할 수 있었는지? 같은 세월 나는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혹 마음 맞는 이 있으면 술잔으로 쓰리라 마음먹고 몇점 사두었던 막사발 하나 꺼내들고 혼자 한잔 따른다. 가슴깊이 파고드는 이 짜릿함이 어찌 술기운만일까?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나 몇번이나 떠돌아 이사 다니며 살아온 나는 고향이 없다. 어릴적 추억이 그나마 남아 있어야 할 도심 속 마을 마저 도로와 터널 속으로 다 사라지고 모두 고향간다는 추석날, 아무 곳으로도 갈 곳이 없고 찾아뵈어야 할 어른도 없는 나는 이렇게 날 밤 지새우며 원적지 주소를 외운다.
함경북도 회령군 화풍면....
편고재 주인 어른의 회령요 항아리 단상에 그만 울고 말았다.
오래전 선친께서 들려주시던 회령자기 이야기, 유약에 소똥을 좀 넣는다는 설도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대단하다시며 자랑하시곤 했는데...
지금 마음이야 자주 들러서 공부하리라, 귀동냥 하며 또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리라 하지만 그저 이 한 밤 황홀하게 지새운 것 만으로도 족하다.
목월 시인은 '밤에 쓴 편지는 믿지말라'했는데, 이 밤 그냥 감흥에 젖은 나를 믿기 정말 어렵다.
2004.09.25 아츠넷(http://www.artsnet.co.kr) 편고재 주인의 열린 사랑방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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