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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첫눈 내린 설악 등반, 조난당한 이야기

Etranger nam 2011. 6. 26. 05:13

 2005 첫눈 내린 설악 대청봉 설경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10월 21일 금요일 저녁 10시 시민회관 앞에서 무덕태고 산악회 버스를 올라탔다. 그것도 산행 경험이 전혀 없는 아내를 데리고..

 

밤새워 달려 한계령에 이르니 새벽 5시, 때 맞춰 내린 첫눈에 얼어붙은 도로가 빙판이었다.   

오색에 이르니 대청봉에 눈이 18센티 쌓였고 강풍이 분단다. 방한복 아이젠 등 겨울 등반 장비 없는 사람은 입산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러나 무슨 만용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데리고 덜컥 산에 붙었다.

캄캄한 산길, 아이젠도 스틱도 없이 헤드랜턴 하나만 의존하여 눈길을 걸어 올랐다. 한30분 숨결 가다듬는 시간이 어려웠다. 거기다 Morning 대변이 급하여 근처 숲속을 드나들다보니 일행은 이미 저만치 가버리고 우리만 남았다.

 

한식경 지나 날이 밝아오는데 길은 완전 빙판이며 아침 바람은 왜 그리 차거운지... 아내는 그만 돌아가자고 보채기 시작한다. 그러나 버스는 설악동에서 기다린다는데...  

그리고 대청 천불 완주를 하고잡은 욕심, 뜻하지 아니한 설경이 천지를 휘감아 너무도 황홀한데 어찌 돌아서리요. 더구나 금년 첫눈이 아닌가? 눈 덮힌 대청을 어찌 모른 척한단 말이냐.

 

미끄러지며 엎어지며 억지춘향으로 대청에 이르니 이미 오전 11시 정상 속도보다 2시간이나 더 걸렸다. 아내는 나를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오른다리 관절 통증이 장난이 아니란다. 관절통은 하산 때 더 심해지는데...

 

대청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雪岳이었다.

눈아래 눈 덮인 공룡능, 화채능, 용아능의 암릉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멀리 울산바위 그 넘어 검푸른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니 아내도 잠깐 통증을 잊은 듯 경치구경에 한창이다.

 

중청 대피소까지 겨우 500미터 내려가는 길이 험난한 하신길의 시작이었다. 대피소 지하에서 차거운 김밥 꺼내들고 요기나 하려는데, 더운 물이 있어야지.

 

몸은 이미 많이 얼었고 다리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아내의 원망어린 눈총을 받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천불동계곡 7시간 하산 길이  서서히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옆의 다른 등반객들이 무리하지말고 오색으로 도로 내려가란다. 아이젠도 스틱도 없이 다리 아픈 사람이 도저히 갈 수 없는 너무 험하고 먼 길이라는 경고와 함께... 

그러나 다른 팀에서 아이젠 한벌을 넘겨주고 무릎용 압박 거들을 주면서 용기를 내라는 격려에 또 다시 만용을 부렸다. 사발면 한 그릇 얻어 먹고 낮 12시 소청을 거쳐 본격 하산을 시작하였다.

 

허나 소청 -희운각 사이 깍아지른 경사로가 어디 장난이던가!!

완전히 얼어붙은 빙벽상태인 곳을 한걸음씩 내려서다가 구르고 넘어지고 엉망이 되었다. 아내는 완전히 울상이며 고통을 호소하는데, 얻어서 착용한 아이젠이 한발에만 착용하여 체중을 실은 탓인지 내 오른 무릎도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운동 전혀 안하고 가까운 산에도 잘 안오르는 게으름이 원인이었다. 내 몸은 이미 옛 몸이 아니었다.

 

희운각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2시 30. 앞으로도 정상 속도로 5시간을 더 가야한다.  아이젠을 넘겨주던 팀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안쓰럽게 보더니  스틱 2개를 더 주면서 하산 후 택배로 보내달라며 먼저 훌쩍 떠나버린다.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 산인심이던지...

 

급경사는 나아졌지만 이번엔 너널밭을 방불하는 바위길, 오르내리는 철계단길의 연속은  그 아름다운 천불동 경치를 느끼지 못할만큼 강한 통증으로 다리를 죄어들기 시작하였다. 죽음의 계곡을 지나 천당폭포를 거쳐 양폭산장에 이르는  한국 최고의 단풍빛 가득한 계곡을 내려오면서도 예정된 시간에 도저히 설악동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휴대폰은 통화권 이탈및 전원이 완전 소진되어  어디로도 연락할 길이 없었다.

 

아내는 스틱을 의지하여 천천히 걸어가는데 뒤를 따르는 내가 더 큰일이었다. 내리막 길 계단길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밀려와 자꾸 속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우여곡절 양폭 산장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가깝다. 아무리 급해도 먹을 건 먹어야지. 국수한 그릇 시켜 둘이 나누어 먹고, 어쩌나 고민하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한 등반팀에게 우리 산악회와 버스를 찾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고 다시 내려서는 길 앞으로도 정상속도로 3시간 정도인데 우린 아픈 다리를 끌면서 몇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길을 재촉하였다. 산에서는 왜그리 빨리 해가 지는지 자꾸 어두워지는 길을 천천히 내려서길 30분, 도저히 더이상 걸을 수 없다는 아내는 119구조대를 부르잔다.

그러나 연락할 방도가 있어야지. 차라리 양폭산장에서 자고 올걸 그랬나 싶었다.

 

우릴 앞서 지나가는 다른 등반객을 다시 붙잡고 통사정을 하였다. 우린 도저히 오늘 중으로 하산하기 어려우니 관리사무소에 말이나 한마디 해달라고... 그들은 우릴 이상한 눈으로 보더니 무릎에 에어파스를 뿌려주며 천천히 내려가란다. 관리사무소에 말은 해주겠다고 하면서...

 

그 이후 몇시간을 걸었는지 기었는지 모른다. 시계도 없고 사방은 이미 칠흑같은 어둠에 휘감겨버렸고, 길은 여전히 바위길 철다리길로 이어지는데 가다가 서다가 기다가 서다가... 한 20분 간격으로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등반객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고 길을 잃지도 아니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릴 앞지르는 사람들이 없어져 버리고 우리만 남겨진 것을 깨달았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고 체온도 떨어지고 무서움도 밀려오고, 아내는 참으로 대책없는 남편이 기도 차지 않는 듯 말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먼저간 분들이 관리소에 이야기를 했다면 누군가 우릴 구조하러 오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다가, 아닐거야 밤늦게 내려오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라야 오지, 길도 뻔한데 하면서, 불안감을 애써 눌렀다.

그러던 중 저 앞에서 밝은 서치라이트 몇개가 나타나고 젊은 사람들이 보였다.

신고를 받고 올라왔는데 다리 아파 못내려온다고 하신 분들이 맞냐고 묻는다.

아이고 살았구나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아내는 구조반에 업혀서 내려가고 나는 부축을 받으며 다시 걷기를 다시 1시간, 비선대에 도달하였다.

 

시계는 이미  9시를 넘어 10시에 이르렀고 구조반은 우리땜에 퇴근도 못했단다. 미안하였다.

갈증에 찬물 한그릇을 벌컥 마셨더니 갑자기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요동치는데 저체온증이었다. 구조반의 마사지를 받고 담요를 두르고 더운 물 한그릇 먹고야 정신을 차려 설악동가는 관리소 차량에 올랐다. 아무도 없는 설악동 매표소 입구에서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자판기 커피 한잔 마신 후 택시를 타고 속초로 향하였다. 겨우 방한간 얻어 쉬는데 아내는 한마디 잊지 않는다.

 

"다음엔 젊은 애인을 구해서 같이가든지 다시는 이런 산행은 말도 꺼내지 마라" 

 

디카마저 안가져가서 사진한장도 없다.

아내는 참 다행이란다. 이상한 몰골들을 찍어서 어쩔 것이냐고...

 

양양공항에서 부산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동해안은 절경이었다.  

너무도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덕에 우리나라 지도를 라이브로 볼 수 있었다.

 

다음엔 한계령으로 올라 봉정암 백담사로 내려오는 길을 가볼까?

그런데 누구하고 간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