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중국 북경, 양자강 삽협, 무한, 소주, 상해 여행기
중국에는 3마리의 용이 있다고들 한다. 그 용들은 중국인들의 수호신이며 또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신이기도 하고, 또 모든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부모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용의 이름은 하나는 만리장성 또 하나는 황하이고, 세번째는 양자강이다. 양자강은 외부에 알려진 이름이고 중국인들은 그냥 장강(長江)이라고 부른다. 어릴적 세계지도를 보면서 어마어마하게 큰 대륙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두 강줄기를 보면서 도대체 이 강들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를 막연히 상상해보곤 했다. 우리나라 서쪽 바다를 황해라고 부를수 있도록 붉은 황토물을 토해내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 황하, 그리고 삼국지, 수호지 그리고 모택동에 이르는 수많은 중국관계 서적에서 언제나 도도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장강, 이 두강에 대한 나의 동경은 어쩌면 미지에의 그리움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운이 좋아서인지, 나빠서인지 모르지만 93년 북경, 계림, 상해 여행에 이어 금년(1995년) 8월 1일 부터 9박 10일의 일정으로 두번째 중국여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정의 핵심이 양자강 삼협 여행이니 나로서는 오랜 동경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였기에 모든 사정을 제쳐두고 비행기를 타버렸다. 북경에서 천안문, 자금성, 명 13능, 만리장성을 다시한번 둘러 보았지만 두번째 방문이라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고, 다만 1863년에 개업한 후 130여년간 계속해서 영업을 하고 있는 유명한 북경오리구이집(페킹 덕으로 세계에 알려진 일품 북경요리) , 전취덕(全聚德)을 다시 한번 가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나무불에 천천이 구운 오리 통 바베큐를 껍질과 살이 한 조각에 모두 있도록 썰어서 얇은 밀전병위에 날파와 춘장을 얹어 싸먹는 그 맛은 지금도 입안에 침이 흐를 정도의 감동이었다. 북경 가시는 분들은 반드시 이 집을 찾아가셔야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음을 유념하시라.
페킹덕 (북경오리구이) 전취덕 본점 앞에서
다시 찾은 천안문과 자금성
중경은 양자강 유람의 출발점이다. 6800킬로미터가 넘는 큰 강을 다 돌아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련한 일이며, 그 중 협곡을 이루고 있는 절경 약 1000킬로미터만을 3박 4일의 일정으로 武漢까지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시간과 경비 절감상 그 중에서도 800킬로미터만 골라서 沙市까지만 2박 3일의 일정으로 중경을 출발하였다. 8월 4일 오전 8시였다. 중경은 고원지대에 속하며 안개가 많고 공해가 극심한 내륙도시인데 해방직전까지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던 우리와 인연이 있는 도시여서 더욱 정겨웠다. 임시정부터에는 이미 다른 주택들이 들어서버렸지만 우리 정부의 지원으로 사적지로 복원작업이 진행중이어서 흐뭇하였다.
중경 임정터 복원지 앞에서
양자강은 거대한 도랑이었다. 왜냐하면 피빛만큼이나 붉은 물줄기가 마치 홍수뒤의 도랑물처럼 무서운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황하라야 물이 붉지 양자강이야 맑은 물이 흐를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천산산맥과 중앙아시아 산악지대에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온 대지의 황토를 모두 실어내는 까닭에 년중 이렇게나 탁한 황토물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래 황하 하나로야 어찌 우리 서해를 황해로 만들 수 있겠는가. 두마리 용이 합심하여 일을 하는 것이 맞을 법도 했다.
우리가 이용한 크루즈선은 巴山호로 중국 주석 강택민이 탔던 배라고 한다. 아주 크거나 호화롭지는 아니했지만 대략 1급호텔 수준의 객실을 2, 3 ,4층에 가지고 있었고, 선내에 레스트랑, 바, 디스코텍, 병원 미용실, 안마서비스, 상품판매소등이 배치되어 여행에 전혀 불편이 없는 수준이었다. 운항중 선장 주최 파티도 가지는 등 즐거운 여행이었다.
* 이 파산호(巴山號) 에서 1985년 일련의 중국 국내외 유명 경제학자와 정부 관원들이 모여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약 한 주간의 국제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유람선 위의 회의는 또한 중국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에로 전환하는 계몽적 사상의 발원지로 불리웠습니다. 그때로부터 31년이 지난 2016년 '파산호 (巴山號) 회의가 중국 베이징에서 재개되었으며 첫 의제는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구상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은 현재 '일대일로' 구상은 번영발전의 생기와 활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속도와 성과가 기대치를 초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 일대일로의 일대(One Belt)는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뻗는 육상실크로드 경제벨트이고, 일로(One Road)는 동남아를 경유해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21세기 해양 실크로드를 말한다.
파티를 열어준 선장, 선원과 한 컷
장강 양안으로는 마을도 보이고 깊은 계곡으로 흘러들어가기도 하였다
낙동강 물줄기의 몇배나 빠른 속도로 흘러 내려가는 격류 위를 한나절 달려 풍도라는 작은 도시의 鬼神城을 관광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여기까지의 장강은 평범한 강의 모습이었다. 다만 큰 잠자리채같은 것으로 고기를 떠내는 (잡고있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고, 쉴새없이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풍도 귀신성은 지옥을 묘사한 장치물이 많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우리는 전망대로 달려나갔다. 눈을 의심할 정도의 엄청나고 아름다운 풍광이 마구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눈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기암절벽과 동굴, 그리고 동양화속에서나 보암직한 웅장한 산세가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삼협, 세군데의 협곡이라는 말인데 처음 만나는 제 1협인 셈이다.
약10여킬로미터를 정신없이 사진찍으며 내려오니 巫山이었다. 장강으로 들어오는 지류중 제일 크다는 대영하속에 펼쳐진 소삼협을 보기 위하여 작은 배 (약 20명정도 승선할 수 있으며 삿대로 방향을 조정하는 소 유람선)로 갈아탔다.
이 소삼협은 그야말로 급류 (T.V.에서 보았던 급류타기의 현장보다 더 거센 물살)를 타고 올라가면서 감상하는 코스인데 왕복 6시간이 걸렸다. 이 협곡은 문자 그대로 정신없는 곳이었다. 위로는 말로 표현못할 산세가 계속 나타나고, 아래로는 도저히 배가 갈 수 없을 것 같은 격류와 돌밭이 계속되는 통에 어떻게 사진을 찍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나중에 사진을 빼보고 느낀 일이지만 엄청난 자연을 작은 사진기로 손바닥만하게 찍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소삼협 입구에서 작은 목선으로 갈아타고 한나절 게곡을 즐겼다.
이 소삼협의 풍광을 사진으로 담으려면 헬리콥터를 타고 광각렌즈를 사용하여 조망한다면 다소 찍어낼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신비로운 것은 90도 깍아지른 절벽, 물로부터 약 50미터되는 지점에 약 1미터 간격으로 지름 약 15센티미터 정도의 네모난 구멍이 일정하게 나 있었는데 그것은 약1700년전 당시의 사람들이 그 구멍에 대나무를 꼽고 , 위에다 널판지를 깔아 길로서 사용했던 잔도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 절벽에 기어 올라가서 저렇게나 일정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8월 6일은 제 2협 약 45킬로미터와 義昌의 갑문 (강의 낙차가 커서 도크식 갑문으로 통과함)
을 통과하였다. 갑문은 장강의 수위가 달라 배가 지나가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장치다.
큰 배들이 갑문 안으로 들어서면 갑문이 닫히고 수위 조절이 시작된다. 갑문 통과 후 협곡의 수위가 크게 낮아짐므로 갑문 속의 물을 뽑아 내어 아래 편 수위에 맞춘다.
배가 이 갑문을 통과하는데는 대략 4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대기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강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 넉넉한 품안에 담을 것도 많으련만 하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2박 3일의 일정동안 남자 4구 여자 2구의 사체는 관광객을 경악으로 몰아넣었지만 지나가는 그 어느 배에서도 건져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방치된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쉽게 납득되지는 않았다.
의창에서 사시에 이르는 장강은 제 3협을 제외하면 엄청나게 넓은 바다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도상으로 아직 장강의 중류도 다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폭을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모습속에 좁디 좁은 곳에서 아웅다웅 살아온 내가 투영되어 무척 안쓰럽게 느껴졌다.
제 3협 약 80킬로미터를 지나서 沙市에 도착하였다. 새벽 5시경에 제 2협을 통과하는 바람에 잠을 설치기는 했지만 볼수록 신비로운 산세에 피로를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아침의 상쾌한 기운과 잘 어우러지는 자연의 조화는 정말 잘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사시에서 무한까지 이르는 고속도로는 한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엄청나던 산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사방을 둘러 지평선만 아득할 뿐 3시간넘는 동안 작은 동산하나도 볼 수 없었다. 대륙이었다. 저 넓은 평원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량의 곡물들이 13억 인구를 배부르게 하고도 남아서 이 좁은 나라 한가위 차례상에도 오른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지도를 보니 한 3센치미터를 왔을 뿐이었다.
무한에서는 황학루에 올라 양자강을 다시 한번 조망하였고, 상해에서는 임시정부청사를 다시 한번 방문하였고, 와이탄 (19세기 돌건물이 늘어선 대표적 거리)의 밤거리에서 한참 건설중인 동방명주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와이탄 야경은 여전히 현란하고 아름다웠으나 밤 10시에 무조건 가로등및 지하도 그리고 건물을 비추던 조명등을 일시에 꺼버리는 일은 여전했다.(관리인이 밤10시에 퇴근하기 때문)
물의 도시 소주에서는 호구탑(중국의 피사의 사탑)과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 보았는데 그 대표적 관광지에서 보안요원인듯한 정복입은 사람이 젊은 여자 행상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끌고 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옥의 티였다. 아직 이곳이 공산주의 독재국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한 황학루를 배경으로
황학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무한 시가지와 장강
소주에서는 중구의 피사의 사탑인 운암사탑(호구탑)을 지나칠 수가 없다
93년에 이어 다시 찾은 상해 임정, 김구선생 흉상앞에서
한참 건설중인 동방명주를 배경으로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 앞에서
중국은 변화하고 있었다. 2년전과 또 달라져 있었다. 많이 정리되고, 보다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엄청난 잠재력이 곧 폭팔할 것 같았고 아직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순수함이 살아있었다. 일면 두려웁고 일면 경이로왔다. 다만 아직도 쇼핑할 때 10배 20배를 깍아야하고 그것도 미심쩍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언제 해소될지 궁금할 뿐이었다.
* 장강삼협(長江三峽)은 중화인민공화국 충칭 시와 후베이 성 경내의 장강 주류에 있는 세 개의 협곡의 총칭이다. 충칭시 펑제 현의 백제성에서 후베이성 이창 시 남진관까지 193km의 사이에, 8km에 이르는 가장 상류의 《구당협》(瞿塘峽), 45km에 이르는 《무협》(巫峽), 그리고 66km에 이르는 가장 긴 《서릉협》(西陵峽)이 연속하는 경승지이다. 삼협을 배로 왕복하는 크루즈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코스로 충칭에서 이창, 우한, 상하이를 운항하고 있다. 삼협의 하류에는 국가적 사업인 《싼샤 댐》이 건설되어 삼협의 경관이나 환경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삼협에서는 쓰촨 분지를 나온 장강이 분지의 동쪽에서 동서로 뻗은 《무산》(巫山) 등이 홀쪽하고, 험한 습곡 산맥을 관통해 흐르고 있다. 장강 양쪽으로 우뚝솟은 높은 산은 가끔 안개나 구름에 자욱하게 둘러싸여 산수화와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요하며, 예부터 시와 글로 노래한 풍경이나 고건축이 삼협 주변에 산재해 있다. 예부터 〈구당은 웅장하고, 무협은 수려하며, 서릉은 기괴하다〉(구당웅, 무협수, 서릉기)고 삼협을 평가했다. 댐 건설 전의 삼협은 장강 수운의 험한 곳이며, 여름에 물이 불면 수위가 올라 항해에 위험이 따랐다.
삼협 지역에는 지질의 차이에 따라 구당협, 무협, 서릉협과 같이 험하고, 폭이 좁은 협곡의 부분과 넓고 완만한 관곡의 부분이 있다. 삼협 특유의 경관인 협곡 부분은 석회암이 많아 풍화에는 지극히 강하지만 물에는 용식되기 쉽고, 물이 흐르는 부분만큼이 깊게 패여 간다. 또 석회암에는 수직의 균열이 생기기 쉽고, 물이 균열된 부분으로 흘러들어와 그 아랫 부분을 침식해 간다. 골짜기가 깊어지면 양안의 바위가 평형을 잃고, 수직으로 발달한 균열에 따라 골짜기에 떨어져 내려 양안이 우뚝 솟아 있는 절벽이 되었다. 사암이나 혈암이 많은 지역은 침식이 진행되는 차이가 생겨 넓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무산으로 대표되는 쓰촨 분지 동부의 습곡 산맥군은 7000만년 전의 연산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산맥은 서남에서 동북 방향으로 뻗어, 남쪽은 높고, 북쪽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이 산맥들과 《대파산맥》(파산)의 사이에 생긴 낮고, 움푹 들어간 부분을 지나 옛날의 장강은 동쪽으로 흘렀지만, 지각의 상승에 의해 협곡이 더욱 깊어져, 현재와 같이 험하게 우뚝 솟은 지형이 되었다.
구당협
최상류에 있는 《구당협》(瞿塘峽)은 길이 8km로 비교적 짧지만 가장 웅대한 부분이기도 하다. 높이 1000m를 넘는 산맥을 일도양단 한 것 같은 협곡을 장강이 관통한다. 이백은 구당협에 있는 기문(夔門)의 정경을 찬송하였다. 기문은 100m의 폭의 장강 양안에, 강수면에서의 높이가 1,200m에 이르는 높이 솟은 석회암 절벽이 문기둥과 같이 서 있는 곳으로 예부터 기문천하웅(夔門天下雄)이라고 그 웅대함을 칭해 왔다. 북쪽 언덕에는 백제성과 백제묘가 있는 백제산이 있지만, 댐 호수의 축수로 호수에 떠올라 있는 섬이 되었다.
무협
구당협과 이어진 《무협》(巫峡))은 충칭시와 후베이성의 경계에 있는 45km 길이의 계곡으로, 《무산산맥》을 북서에서 남동에 꽤뚫고 무산산계의 사이를 동서로 흘러간다. 무산의 십이봉을 시작으로 하는 수려한 경관이 많은 문인묵객에게 영감을 주어 왔다. 십이봉에서도 《신녀봉》(神女峰)은 가장 볼 만한 곳으로 구름 속에 봉우리 자락을 내밀고 있다.
서릉협
마지막 《서릉협》(西陵峽 )은 70km 가까운 길이로 삼협 중 가장 길며, 무산의 동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뻗어있는 산맥을 장강이 차례 차례 관통한다. 양안에는 험한 바위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몇 개의 사원과 취락이 있는 것 외에 사람의 모습은 없고, 일곱 개의 계곡과 두 개의 급류가 있어 위험한 장소이다. 《삼두평》(三斗坪)은 일찍이 한 채의 집에서 삼두(세 말, 三斗)의 쌀로 가게를 열어, 여행자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만들어진 지명이지만, 이 곳에 폭 2,309m의 싼샤 댐이 건설되었다. 배는 댐을 우회 하는 갑문을 거쳐 항해한다. 서릉협 하류의 급류는 1970년부터 1988년에 걸쳐 건설된 갈주댐(싼샤 댐의 38km 하류)에 의해 흐름이 느려져 항행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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