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상해 대련 북경 계림 광주 홍콩 여행기
19세기와 20세기의 공존 상해
1993년 7월 14일 오전10시 대한항공 KE6135편은 상해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미 구면인 요령사범대학의 부총장 주성여씨가 외사처 직원 왕환민씨와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왕씨와는 초면이지만 전화와 팩시를 통해 이미 서로를 익히 알고있는 터라 오랜 친구를 만난듯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숙소인 상해국제문화교류센타로 가는 길목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수십층의 초고층빌딩과 현대식 호텔, 한창 재개발중인듯한 건설의 열기, 건립연도를 추정하기 어려운 낡은 건물앞의 대나무 빨랫대, 캐딜락 리무진과 무궤도 전차 그리고 2층버스와 택시 또 자전거의 무질서한 질주, 세련된 복장의 여인들과 팬티바람으로 활보하는 중년남자들, 황포강변의 낯익은 19세기 건물들(영화 태양의 제국 을 통해 눈에 익어 있었음)과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거대한 타워의 건립현장, 세계 각국의 패션을 대표하는 각종 브랜드명으로 가득찬 남경동로의 번화한 거리와 50년대 부산의 판자촌이 떠오르는 칙칙한 목조 주택가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져 있었던 것이다.
상해 예원 앞 상가
상해 임시정부청사는 깨끗하게 새 단장 되어있었다.
지난해 노태우 대통령의 방문을 전후하여 상해 인민정부에서 보수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 안내아가씨의 설명을 들으며 좁은 목조 3층건물을 오르면서 자꾸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기어려웠다.
주변의 지지리도 낡아버린 서민용 목조건물들과 빛바랜 임정요인들의 사진이 나를 새삼 한국인으로 느꼈게 했던 것일까.
골목어귀 한국손님들을 환영합니다 라는 간판을 단 작은 기념품판매점이 조금은 어색했다.
이곳이 지난 수십년간 적대국으로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임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낡고 허름한 빈민촌 한켠에 터를 잡고 있었다
황포강변의 공원에는 더위를 피해 나온듯한 젊은 남녀들의 천국이었다.
아무곳에나 자유롭게 앉거나 들어눕고, 서로 끌어안고 떠들고 있었다. 밤10시가 되자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공원 관리인이 불을 끈 것이다. 대로를 건너야하는 지하도 마저 불이 꺼졌다.
관리인이 퇴근할 시간이니 시민들이야 불편하던 말던 관계없이 불은 꺼지는 것이다.
지하도를 이용못하고 6차선대로를 무단횡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해시민들은 그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듯 태연하였다.
이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상해의 숙소는 깨끗한 새건물이었다. 전국의 대학교원들의 출장이나 외빈을 위해 공동 사용하는 대학소속의 유스호스텔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새 건물이 웬지 썩 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조바심이 났는데 다음날 아침에 현실로 닥아온 것은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머리에 비누를 칠하다 말고 중지되었으니 이를 어쩌랴. 결국 아침식사시간을 어길 수 밖에 없었고 먼저 오셔서 좌정하고 계시는 이사장님과 학장님께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지난밤 곡예구경과 황포강변의 산책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면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물이 떨어지기 전에 샤워를 무사히 끝내었겠지만, 그래도 밤거리의 풍경이 보고 싶어 숙소 주변의 노천 야식당가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늦잠의 원인이었고 결국 물없이 아침목욕을 하는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로수 우거진 좁은 도로를 따라 공항으로 달리는 길에는 아침운동을 나온 시민들이 태극권과 댄스를 즐기고 있었고, 출근하는 자전거의 행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상해비행장의 공항커피숖은 19세기 서양영화에서 본듯한 곳으로 낯설지 않았다. 커피가 식어 맛이 없었다.
상해 홍차오 공항 출국장 커피숖
만주 개방의 관문, 대련
대련비행장은 정말 조그마한 시골역사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공항청사가 한참 설중임을 보고 중국이 개방화와 함께 국제화의 길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읽을 있었다. 요령사대의 하걸 총장과 변언근 외사처장 그리고 몇몇 교수와 직원들이 환영해주었다.
비교적 깨끗하다고 느껴지는 거리를 따라 도착한 숙소는 대련시 국빈관으로 쓰이는 국영 봉추도호텔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빌라형 독립가옥3호관을 배정받았다. 이곳은 지난날 주은래 수상이 묵어가던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번에 중국을 방문한 한국의 손님들을 환대하기 위해 보시라이(薄熙來)시장이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는 얘기에 흐뭇하였다. 외국 귀빈으로는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그리고 북한의 김일성이 이곳 5호관을 이용했다고 하는 얘기에 이곳이 중국의 인민들과는 격리되어 당간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숲속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온 외진 곳인데다가 입구에 군인들이 입초하고 있었고 또 일단의 군막사가 있어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그림같은 해안의 풍광에 금방 친숙할 수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이 2층으로 우리를 안내하였고, 높은 천정의 객실은 거실과 침실로 나누인 스위트형이었는데 상당히 넓었으며, 아주 무겁고 튼튼한 나무로 만든 책상, 소파 그리고 붉은 비로도 커튼, 오래된 모습의 네발달린 래디오, 하얀 모기장을 쳐놓은 침대등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영빈관은 봉추도 호텔로도 불리는데 봉추란 빨래방망이 같이 생긴 호텔앞 바다 섬에서 따온것이라고 한다.
식사후 태종대 일주도로를 연상시키는 해변의 산복도로로 관광을 나갔다.
포장은 되어 있으나 주변의 조경이 아주 서툴러 아쉬웠다. 내려다 보이는 바다의경치는 장관이었다.
신발모양의 섬 토끼모양의 섬 고래같은 섬 그리고 봉추 곧 빨래방망이 같은 섬, 톱날같은 바위와 어울리는 새로 만든 관광용 다리가 아름다웠다.
더구나 이곳에서 중국어 연수차 와 있는 우리 경남전문대학의 학생들을 조우하여 그 기쁨은 더할 나위없이 커졌다.
모두 활기찬 모습이었다.
대련시가지는 평범한도시였다. 거리를 오가는 무궤도전차와 유궤도 전차, 우리가 지난날 도락구 라고 불렀던 멋없이 큰 트럭, 일본제 자동차가 대부분인 택시, 그리고 한국의 현대자동차 소나타가 상당히 많이보였다.
유궤도 전차를 보면서 60년대 학생과 서민의 발로서 부산시내를 오가던 전차가 떠올랐고, 소나타 승용차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치가 새삼 느껴졌다. 시중심가의 백화점은 제법 큰 규묘였으나 진열된 상품의 질은 아주 낮았고 가격은 이곳 사람들의 소득수준과 비교할 때 상당히 비싸다고 느낄 정도였다.
시장경제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거리는 행상, 노점상 그리고 대소 점포들로 아주 혼잡하였다.
대련 시장 보시라이(薄熙來)와의 회담및 만찬을 가진 대련호텔은 고풍어린 곳이었다.
대련시장 보시라이(薄熙來)는 큰 키에 세련된 매너를 지닌 40대 초반의 젊은 신사였는데, 시장과 장성만 이사장님과의 공식 요담에는 격식있는 의전 절차를 밟았고, 식사시간에는 해박한 지식과 유창한 영어로 시종 분위기를 지켜나가면서 향후 대련의 발전계획과 대외협력구상을 설명하는 모습에서 의욕적인 인상을 받았다.
중국의 내일이 바로 이러한 모습의 테크노크래트들에 의해서 이끌어진다고 볼 때 그 저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대련시장 부임후 첫 해외 나들이를 한국 부산으로 다녀왔다고 했다.
부산과의 자매결연을 추진했으나 상해시에게 이니시어티브를 빼앗겨 섭섭하다고 하면서 그래도 경제적 사회적 교류가 활발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특히 문화적교류는 이번 우리 일행의 방문이 처음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아주 뜻깊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날의 요담은 그날 저녁 대련의 T V 및 라디오방송 그리고 일간신문에 보도되어 우리를 더욱 기쁘게 했다.
대련시장 보시라이(薄熙來)는 최근 시진핑에 의해 숙청되었다.
중국,그리고 대련은 한국의 투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넓은 국토와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위에 해외자본만 들어와 주면 그들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대련의 경제개방지구를 둘러보았을 때 상당한 수준의 기업들과 공장들이 건설되고 또 가동되고 있었다. 아직은 제품의 질이 떨어지긴 했지만 품목의 다양함과 의욕적인 경제활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너무 갑자기 불어닥친 시장경제의 열풍이 자칫 이곳 사람들을 천민자본주의에 먼저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무엇이든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상업이 가장 유망한 산업이 되어가고, 심지어 외국인을 대상으로 폭리와 속이기를 당연시하는 풍조가 눈에보여 안쓰러웠다. 우리 일행이 대련의 중심부 시장통에서 과일 몇개를 사면서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보니 그러한 느낌은 더욱 커졌다.
16일 오전 요령사대를 방문하였다. 상당히 큰 학교였다. 교내에 2000여명 교직원의 사택이 모두 마련되어 있고,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과 많은 기자재를 갖추고 있는 종합실험실습센터, 그리고 외국과의 학술문화교류를 위한 해외교류문화센터가 깨끗한 숙박시설과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교내에서는 학생이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것과 별도의 청소하는 사람없이 도서관이청결을 유지하고 있는 일들이 반드시 사회주의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날의 메인 이벤트로서김수석 경남전문대학 학장과 하걸 요령사범대학 총장사이의 자매결연 조인식이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일년여간의 사전 조정작업과 요령사대측의 한국방문등으로 진행되어온 절차가 드디어 그 마무리를 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뜻깊은 것은 이날의 조인행사에 우리 경남전문대학생 40여명이 배석하여 조인식을 지켜보아준 것이었다. 젊은 학생들에게 더 넓은 세계로의 도전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산 교육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장성만 동서학원 이사장님의 배려로 우리 학생들과 함께 중국에서 정통 중국식 오찬을 가진 것도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저녁에는 조선족 교수로서 이번 방문의 실말이를 제공한 장원철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마침 장교수의 고희를 맞아 자녀들이 모두 모여 화목한 자리에 초대를 받아 더욱 감사하였다. 방이 3칸 있는 25평 남짓의 5층아파트 였는데 상당히 낡은 집이었다. 도색이 벗겨진 것은 물론 각공 금속성 외내장재는 모두 심하게 부식되어 보기 흉했고 복도쪽에는 유리창이 깨어지고 때묻은 모습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서민아파트중에서도 가장 슬럼화된 곳보다 더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복도에 전기시설이 없어 밤늦게 5층에서 우리는 라이타 불을 의지하여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집세없이 집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거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주는 사회주의체제의 장점일 수도 있지만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개인이 노력할 여지가 없는 한계도 노출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상해, 북경,그리고 계림등에서 일반시민들이 살고 있는 주거환경이 이 장교수의 집보다 훨씬 더 열악한 것을 보고 놀랐고 또 그들은 그것을 오히려 당연히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계급없는 평등사회를 자랑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신분과 직위에 따라 생활 환경의 차별이 주어지는 모순구조는 익히 알려진 터이지만 정작 실감하고 보니 감회가 깊었다. 그래도 장교수는 병원장과 의대학장을 지낸분이라 이정도의 집을 배정받는다고 하였다. 직위에 따라 1칸집 ,2칸집 등으로 나뉘어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을 여러번 다녀온 덕으로 장교수댁에는 이곳 사람들의 1년치 소득보다 비싼 각종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제법 세간살이가 풍족한 듯이 보였다. 인간의 삶의질이 향샹되는 최선의 길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일 수 밖에 없음을 느낄 수 있었고, 지금 중국인들이 그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600년 고도 중국의 심장, 북경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륙은 가히 놀라웠다. 55분간의 비행중 시야에 산이 들어오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엄청난 평야가 숨을 막히게 했다. 대륙의 아주 일부분만으로도 좁은 산악반도국가와 너무나도 다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구불구불 평원을 가로지르는 이름모를 강줄기 양편으로 경지는 반듯반듯 정리되어 있었으며, 주거지 역시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었다. 북경근처에 다다르자 산이 나타났다. 산기슭에는 대도시 어디나 볼 수 있는 반갑지 않은 스모그가 자욱하였다. 환경문제는 어느곳에나 있게 마련이다.
트랩을 내려서자 잘생긴 승용차 한대가 활주로를 내달려 와서는 어떤 부인과 아이를 실어나간다. 어떤 존재일까? 아무런 절차없이 트랩앞에서 승용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이곳이 엄격한 공산주의사회이자 또한 특권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임을 느끼게 했다.
시내로 달리는 도로의 양편은 거대한 미류나무숲이었다. 숲사이사이로 양떼들이 방목되어 운치를 더했다. 새로 넓은 도로를 만들어 놓았으나 아직 개통되지아니하여 2차선좁은도로에 자동차의 행열이 끝이 없었다. 길이 넓어지자 말구루마가 나타났다. 2마리 혹은 3마리가 끌고있는 말구루마에는 주로 건축자재들이 실려있었다. 벤허가 생각났다. 거리는 온갖 탈것들의 전시장이었다. 보통의 택시, 경승합차로된 택시, 오토바이를 이용한 택시, 버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자전거의 행열, 삼륜트럭, 그리고 벤즈리무진
북경우의반점(北京友誼飯店)은 북경 최대규모의 국영호텔로서 그 규모나 시설은 좋은 편이었다.
여장을 풀고 이화원으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 낚시와 수영을 같이 할 수 있는 긴 수로가 있어 시민들이 즐기고 있었다.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어느 사회나 관광지는 혼잡하고 시끄러운 모습을 보인다.
첫 방문 유적지 이화원. 서태후 한사람의 여름을 위한 거대한 인공호수를 따라 수만명이 넘는 인파가 들끓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긴 거리의 회랑이 호수를 따라 이어졌고, 대리석으로 만든 배, 호수를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 호수위의 유람선, 정문과 후문앞에서 호객행위하는 승합차 조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안문에서 내려다본 광장은 엄청난 규모였다. 얼마전 셰계의 매스콤을 끔찍하게 장식하던 천안문사태의 현장, 그곳은 달리는 자동차의 행열과 함께 세계의 도처에서 구경온 사람들로 메워져 있었다. 정면 멀리로 모택동기념관이 오른쪽은 인민대회의장(국회), 왼쪽은 역사박물관이, 한가운데는 노동자영웅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에 서서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고, 오늘의 실력자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했던 바로 그곳에서, 자유를 외치며 권력에 맞서던 북경대학생들을 탱크와 대포로 제압해버린 현장을 내려다 보는 감회는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무찌르자 오랑캐 의 대상이었던 그 중공의 권력 심장부에서 중국인들의 환대와 안내를 받으며 관광을 즐기는 한국인이 날로 늘어나는 오늘이 새삼스러웠다. 국제정치의 세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 했던가.
천안문은 생각했던 것 보다 엄청 큰 건물이었다.
천안문 위에서 내려다 본 광장
자금성은 과연 소문대로였다. 남대문보다 훨씬 커 보이는 대문들이 10겹이나 둘러쌓여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사방 수백미터가 넘는 대리석 광장들이 계속 되었다. 황금빛으로 단장된 지붕의 숲이 눈부셨고, 좌우의 궁궐 구석구석은 포기하고 오직 일직선으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대충 구경하고 나오는데도 지칠 지경이었다.
이 거대한 궁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또 그것은 중국의 인민들에게 어떤 삶을 제공한 것일까?
오직 한사람 황제만을 위하여 건설되고 유지되었으며 그것을 위해 수많은 민중이 견딜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강요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 거대한 유적이 짐짓 무서워지기도 했다.
우리의 옛 조상들, 득히 조선시대의 사신들이 이 궁궐의 어느 한 켠에서 명.청의 하명과 눈치를 살피며 떨었을 것을 생각하면 한가롭게 관광하는 오늘의 다른 의미를 느낄 수도 있었다.
천단 이곳은 또 무엇인가?
오직 중국만이 천하의 중심이며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린다는 중화사상의 발원지가 아니던가.
자금성보다 더 넓은 대지위에 품위있는 제단용 건물들이 정말 하염없이 먼거리를 뚝뚝 떨어져서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그곳은 상제를 향한 고대 중국의 종교적 의식이 행해지는 곳이었다.
황제만이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한가운데의 대리석 길을 따라 뜨거운 햇살에 시달리면서 한 꺼풀 한 꺼풀 맨마지막까지 도달하니 하늘을 찌를듯한 높이의 돔형 제단이 앞을 막았다. 건물 앞 마당에는 소를 번제로 하늘에 바치던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제단안에는 상제를 모시는 보좌를 중심으로 하여 1년 4계절을 의미하는 12기둥과 4기둥이 아름들이 나무로 배열되어 있었다. 돌아서 나오는 길은 피로 그것뿐이었다.
점심으로 먹은 베이찡 덕, 오리구이는 참으로 맛있는 요리였다. 중국여행 10일동안 매끼마다 10여가지의 전혀다른 요리를 먹으면서 한결같이 그맛에 놀랐지만 이 오리구이는 참으로 白眉였다. 타지않고 알맞게 구워진 껍질과 살코기가 함께 붙어있도록 즉석에서 썰어대는 솜씨도 놀라웠고 얇은 밀전병에 파와 함께 싸서 먹는 풍취가 한결 맛을 더했다. 확실히 중국은 요리의 천국이었다.
영국식 집에서 일본여자와 함께 중국요리를 먹으면 곧 천국이라고 했던가?
저녁에 호텔 인근에 있는 북경인민대학으로 어학연수를 온 마산의 경남대학생들과 인솔자 이철리교수와 조우했다.
한데 어울려 북경의 한국식 가라오케 백두산주점을 찾았다. 낮에 점심을 먹었던 한국음식점 두산식당 근처에 있는 이 술집에는 흑룡강성과 연변에서 왔다는 조선족 웨츄레스와 호스테스들이 상당수 있었다. 속칭 비디오케에서 한국의 최신유행가들이 중국의 유행가와 함께 흘러 나왔고 손님의 대부분은 개방화와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 큰 돈을 번 중국인들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서울의 강남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요란한 복장의 젊은이들도 있었는데 중국사회가 급속히 자본주의화 해가는 현장이었다. 이러한 규모의 한국식 카라오케가 북경에만 100여군데라는 데 깜짝 놀랐다. 한국인의 방문도 엄청나지만 중국인들에게 밀어닥친 한국식 술문화도 상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의 밤거리에도 예외없이 노변 야식당들이 성업을 하고 있었다. 큰 후라이팬(웍) 하나로 온갖 요리를 만드는 솜씨는 어디에 가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호텔 근처에 있는 북경인민대학을 방문했다. 야밤중에 비공식으로 갔음에도 누구도 막지않아 자유롭게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들의 숲, 잘 배열된 건물들, 넓은 도로등이 넓은 평지에 세워진 대학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외국인용 숙사는 비교적 깨끗했으나, 바로 옆의 중국학생용 기숙사는 너무도 초라하고 더러워 대조적이었다. 대학 외벽을 따라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서있기도 한 알 수 없는 행열이 있었다. 다음날 알아본 즉 상해등 멀리가는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줄 서있는 행열이라고 하였다. 12억의 인구가 자유롭게 여행하기에는 아직 교통편이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해가 되었고, 추석날 역광장을 메우는 우리나라의 예매행열이 생각났다.
20일날 드디어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 명13능이란 지하무덤을 보았다.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산기슭에서 지하로 7층을 내려가니 매끈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지하궁전이 나왔다. 4개의 큰 홀과 복도 돌로된 소파와 항아리, 황제와 황후 2인을 안치한 목관, 그리고 대리석으로된 거대한 문들이 압도해 왔다. 아무리 둘러봐도 물이새거나 샜던 흔적도 없어 당시의 토목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능이 13개 중에서 공개된 이 곳이 가장 적은 규모라고 하는데 100만명이 6.6년을 먹을 수 있는 식량에 해당하는 은 800만량을 사용했고, 연인원 6500만명을 동원했다는 설명문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드디어 만리장성에 올랐다. 가히 세계관광객의 전시장인듯 했다. 장성을 가득메운 인파가 장성을 따라 끝없이 걷고 있었다. 따라서 걷다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생각하니 미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산등성이를 넘고 또넘어 10000리길이 이어지는 이 성벽을 눈으로 보기도 아득한데 어디까지 걸어간단 말인가. 성벽 곳곳에 기대어 사진이나 찍고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까지 실컷 보고 내려올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국영쇼핑센테에서 한 젊은 조선족 판매원은 한국사람들은 월급을 천만원이나 받는데 왜 그렇게 쩨쩨하게 구느냐고 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먼저 왔던 한국인들이 객기를 부려 한국인을 봉으로 보도록 한 것일까? 저 청년이 우리를 상대로 농담을 하는 것일까. 북경우의호텔의 매장보다 평균 2배는 비싸게 책정되어 있는 가격이 조금은 불쾌했다
21일 모택동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엄청난 행열이 건물앞을 뱀꼬리처럼 늘어서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면 아마도 저녁무렵에나 차례가 올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안내하던 왕환민선생이 입구의 경비인듯한 사람에게 무어라고 하니 계속 입장하던 줄을 중지시키고 우리를 먼저 들여보내 주었다. 아마도 한국에서온 높은 분이라고 했는지, 비행기 시간이 급하다고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입장을 정지당한 행열 그 어디에서도 불평의 소리나 반응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권계급이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기고 하였다. 한시간에 8000명이 지나간다는 행열을 따라 곱게 화장된 모택동의 미이라옆을 지나면서 먼저 보았던 명나라황제의 지하무덤이 생각났다.
신비의 선경,계림
계림행 비행기는 1시간 30분 연발한다고 하였다. 소문에 듣던 비행기운항의 무질서를 만난 것이다.
왜 늦는다는 해명도 없이 그냥 도시락을 하나씩 지급하였다. 아마도 먹으면서 불평말고 기다리라는 것인듯 했다. 3시간의 비행중에도 기내식을 받았으니까 점심밥을 두 번 먹은 것이 되었다. 먹는 것 하나는 확실히 풍족한 곳이었다. 중국의 국내선을 세번째 타는데 그때마다 기내식과 캔맥주 캔콜라등이 의무적으로 지급되어 미처 다 먹지 못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계림은 그야말로 한폭의 산수화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기묘하게 생긴 산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활주로에서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비내리는 계림거리는 칙칙했다. 시골은 북경과는 달랐다.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전체적 분위기는 60년대초반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 정도였다. 거리는 아직 비포장된 곳이 많았고 장비라고는 삽한자루로 큰 돌을 움직이며 해내는 화단공사, 목도로서 흙을 운반하는 젊은여인, 그리고 말구루마. 그래도 시내에는 큰 백화점과 깨끗한 호텔, 가라오케등 가장 현대적인 모습들이 낡을대로 낡은 아파트와 어울려 이곳이 관광지 계림임을 느끼게 하였다.시내에 있는 칠성공원과 상비산(象鼻山)을 둘러보고 변두리의 조그마한 국영호텔 Fubo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계림은 남쪽이며 습한 기후라서 여간 무더운 것이 아니었다. 호텔의 에어콘은 작동되었으나 냉각수가 방안으로 떨어져 당황하게 하였고, 쥐까지 뛰어 놀아 끔찍했다.(호텔측에서는 도마뱀이라고 해명하여 더 끔찍했다)
갑판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돌로된 도장(印)재료를 팔고 있는 젊은 청년들과의 흥정도 즐거웠다. 실제 가격이 얼마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무한흥정은 중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상거래인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발할 때의 가격과 배가 목적지에 도달할 때의 가격은 거의 10배의 차이가 나니 먼저 사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꼴이었다. 휴대한 우산이나 파카 볼펜 등과 물물교환을 하는 것이 차라리 효과적이었다. 그 청년들은 임수암교수가 차고 있는 허리띠를 풀어주면 그들이 처음 말했던 가격으로는 우리돈 수십만원어치도 넘는 좌판의 물건을 거의 다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아마도 토끼가 그려진 플레이보이상표가 그들에게 대단한 매력을 주었던 모양이다.
중국에서 공산품의 가격은 그들의 소득수준으로는 전혀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니 외국 유명브랜드제품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쌀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임교수는 바지마저 빼앗길까 걱정되어서인지 단호히 거절하여 그들을 실망시켰다.
관광유람선의 요금은 1인당 점심요리 포함하여 우리나라돈 20,000원 정도였고 사전에 예매하지 않을 경우 승선권을 구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대만 관광객들이 많았다. 우리가 북한땅 금강산을 구경할 날은 언제 쯤일까?
민속 고물들을 파는 상점이 수십곳이나 이어진, 중국 무협영화에서 보았던 전형적 중국거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양삭의 거리를 지나 계림으로 돌아왔다.
숙소인 Fubo hotel 에서 광서사범대학 총장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한 후 계림의 밤거리를 둘러보았다.
기본요금 7원(한국 돈 600원정도)의 삼륜 용달트럭형 택시와 이륜 오토바이 택시를 이용하였다.
계림역 광장에는 대규모 노천식당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고,역사 안팎에는 남루한 차림의 보통 중국인들이 가득차 있었다.
아무곳에나 드러누워 자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하는 노인 한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박깍은 머리에 깊은 주름이 총총박힌 새까만 얼굴, 작고 바싹마른 몸, 약간 굽은 허리, 다리 양쪽 길이가 다르게 입은 검은 무명바지, 배꼽이 보이는 웃옷, 그리고 발가락만 걸게되어 있는 슬리퍼형 신발, 나무막대에 꿴 채 어깨에 올려놓은 개나리봇짐. 무척 풍류있어 보이는 걸인풍의 그 노인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시골 사람이있다.
기차삯은 중국인과 외국인이 거의 3배 차이가 있었고 매표구에는 긴 줄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서 오는 길가에 팬티바람으로 삽을 들고 하수도관 매몰을 위해 깊이가 2미터는 족히 될만한 구덩이를 파고 있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낮 시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이 늦은 밤에 일하는 것인지...
관광객을 위한 집단 노상 쇼핑거리가 있었다. 흥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중국만의 상거래질서는 이곳도 여전했다. 1개에 100원(한국돈 8,000원정도)달라던 우롱차용 차 주전자를 결국 6개에 100원으로 살 수 있었다. 제대로 산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더욱 찜찜했다.
간간이 아가씨 소개하겠다는 젊은 청년들이 꽤나 귀찮게 굴었다. 중국에는 창녀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옛말이 된 듯싶었다.
23일 광서사범대학을 방문했다. 고풍어린 캠퍼스에는 낡은 목조건물들이 여전히 강의동 및 행정동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학 구내에도 민속 고물판 매점이 있었고, 미술대학 교수들이 그렸다는 서화판매센타도 있었다. 이 대학에는 특이한 점이 부설출판사였다. 86년에 개설하여 1,300여종의 각종 도서를 출간한바 있다고 하는 이 출판사는 대학부설로서는 중국내에서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하였다. 임교수는 문학관계 서적을, 나는 史記 및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백화문 번역본 등 역사서적을 한 아름씩 사들었다. 광서사범대학측은 앞으로 양교간 학술교류와 함께 도서의 상호교환출판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자본주의 도시 광주(광저우 廣州)
광주(廣州)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간 우리는 또 한번 비행기의 이유없는 연발을 경험했다.
어김없이 도시락이 배급되었다.
광주의 숙소는 도시을 완전히 벗어난 산속에 있는 호수가의 국영호텔이었는데 도무지 관리를 아니하여 그 시설의 낡음은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더구나 시내와 너무 떨어져 저녁시간을 전혀 활용할 수 없는 불편함까지 예상되어 안내하는 왕환민선생에게 사정하다시피 졸라 시내의 호텔로 숙소를 변경하였다. 왕선생은 상당히 친절하고 성실한 안내자였는데 우리의 숙소 변경요청에 무척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요령사범대학의 의전 규정상 국영호텔만을 이용하게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의 환대를 답례를 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숙박경비를 우리 일행이 부담하는 기회도 한번 달라고 그를 설득하여 주강(珠江)변의 Land Mark hotel에 겨우 여장을 풀었다.
뱀, 고양이, 비둘기, 거위발바닥 등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요리로 가득찬 중국요리의 백미 광주요리가 우리를 반겼다.
광주는 완전한 자본주의사회였다. 거리에서 풍기는 분위기, 시민들의 표정, 빌딩군, 자동차의 물결, 쇼핑거리 및 백화점 등의 엄청난 인파, 그동안 보아온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곳이었다. 소위 경제 특구로서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에 의해 완전히 개방된 이 곳은 외견상 서울이나 부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의 저력은 바로 이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개방의 물결과 외국 자본의 적극유치, 그리고 계속되는 공업화와 수출 드라이브정책은 12억 중국인들과 거대한 대륙 중국 천하를 조만간 이 광주와 같은 모습의 근대적 도시로 만들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엄청나게 싼 노동력이 얼마든지 있고, 상당한 수준의 기초과학의 배경이 있으며, 국제 경쟁력을 뒷받침할 내수시장의 잠재력은 가히 측정하기 조차 어려운 중국. 이 중국은 변하고 있고 또 도전해 오고 있음을 보면서 거품경제의 그늘에서 성장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광저우시를 관통하는 주강(珠江)에서
광저우 손문기념관에서
광저우 육용사화탑(六榕寺花塔)에서
24일 마지막 저녁식사는 대련에서부터 북경, 계림을 거쳐 이곳 광주까지 우리를 성심껏 안내해준 왕환민선생, 장운붕교수와의 이별의 시간이었고, 그동안 쌓아온 정을 더욱 다지는 시간이었다.
장성만박사께서 아끼시던 올림픽엠블럼이 새겨진 IOC위원용 시계를 정표로서 왕선생에게 끌러 주자 황선생은 감격과 아쉬움의 눈물을 보이며 헤어짐을 안타까워 했다.
10일간의 여행중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왕선생과의 우정은 오래 사귄 친구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인들의 솔직하고 순박한 마음은 이기주의와 배타적 공리주의에 물들어 온 자본주의 사회의 계산된 인간들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이라서인지 더욱 값지게 다가왔다. 중국은 가장 오래된 친구이었으면서도 또한 가장 멀었던 이웃으로 우리에게 양면의 모습을 보여왔었지만 이제 개방화의 길을 가는 중국이 더 이상 우리의 절대국일 수 만은 없었다.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노하우 그리고 잠재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동반자 관계를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번 교류가 대학차원에서 이루어진 작은 출발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중국을 이해하고 또 우리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열차편으로 홍콩을 거쳐 귀국하였다. 홍콩은 역시 아시아의 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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