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타가와 지역 탄광 징용희생자 무덤 앞에서
지난 토요일 국제와이즈멘 한일 교류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큐슈지역을 다녀왔다.
교류회 일정을 준비하면서 먼저 료칸에서 제법 호사스런 휴양부터 한 후,
타가와지역의 마쯔리를 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국제 와이즈멘 동래클럽 이준호 사무장의 안내로 너무도 가슴 아픈 민족적 고통의 흔적을 남긴 장소에 들렀다.
탄광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 혹독한 노동과 배고픔 그리고 학대 속에서 죽어간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이름없는 무덤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무덤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너무도 처참한 징용의 역사를 말해주는 흔적앞에 서서
일본의 료칸 문화를 즐기며 은근히 부러워한 마음이 너무도 부끄러워졌다.
누군가 먼저 다녀가신 분들의 헌화와 태극기를 보면서, 그리고 타향살이와 비목을 노래하며
울컥 솟아오르는 눈믈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일본인들의 화려한 가족묘 그리고 개 고양이 무덤을 알리는 돌 비석 곁에
아무렇게나 굴러 다니는 돌맹이 몇개로 남아있는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무덤은 너무도 강한 쇼크로 다가왔다.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고혼을 위해 숙연한 마음으로 꽃송이를 바친 국제와이즈멘 동래클럽 회원들
이 처첨한 역사의 흔적 앞에서 우리는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 먼저 다녀가신 분들의 헌화와 태극기가 더욱 가슴을 아프게 저며든다
태극기와 한반도기 그리고 꽃 한 송이가 고혼들에게 바쳐지는 마지막 정성인 듯...
거대한 나무 밑둥에 일본의 양심적 단체들이 만든 10Cm 크기의 "세계 인류에 평화가 있기를 " 기원하는 팻말, 무슨 의미일까?
거대한 대리석 가족묘 아래 작은 돌비석들은 개 고양이 무덤이고,
그 아래 돌멩이로 표시된 곳, 태극기 꼽혀있는 곳이 징용희생자들의 무덤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대리석 일본인 가족묘 그리고 개 고양이 무덤 아래
숨겨진 듯 자리한 징용희생자들의 흔적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2015년 먼저 다녀와 페이스 북에 올린 이준호 사무장의 글을 그대로 전재하며 억을한 죽음으로 산화한 이름없는 징용자들의 추모를 대신한다
2015년은 일제로부터 광복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일간에 청산하여할 수많은 과거사가 남아있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이 여기에도 있다.
후쿠오카현(福岡県)의 타가와(田川)의 찾기도 어려운 곳에 휴우가(日向) 氏의 집성촌의 공동묘지에
죽은 애완동물을 묻어 둔 묘보다도 못한 처참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묘 37位가 있다.
찾기도 어려운 휴우가 묘지에 부산의 기독교 대안학교인 [나드림국제학교]학생들이 방문하여
해방을 맞고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이름 없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37位에
목소리를 모아 성가와 “타향살이”를 부르며 헌화를 하고 서러운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이제는 발전된 나라의 후손으로서 강제징용의 수모를 당했던 식민지의 이름없는 백성의 처참한 돌무더기 묘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타향살이”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소극적이고 소심한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반영되어...
평화를 기원한다고 오는 것이 아님을 잘 알테지만 그나마 조그만 변화는 나무 그루터기에
일본의 양심적인 단체들이 만든 20Cm 크기의 "세계 인류에 평화가 있기를 " 기원하는 팻말이 보인다.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돌무더기 묘지가 뜻을 가진 한국인들이 찾고 또 찾으며
산길의 묵정밭이 오솔길이 되고 한일 간의 화해를 통한 새로운 대로가 되기를 바란다.
휴우가 묘지를 3번째 찾았지만 일본 전국에 이런 곳이 또 얼마나 남겨져 있을까?
한일간에 청산되지 못한 치욕의 역사를 생각하며 용서는 해도 잊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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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지는 1974년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를 진행하면서 당시 탄광노동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귀동(현재는 사망)씨의 증언에 의해 이곳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의 근대 산업화 과정의 에너지 공급원이었고
식민시대 조선 징용현장, 강제노동의 현장이기도 한 치쿠호(筑豊) 탄전에는 징용의 역사가 남아있다.
자료에 의하면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자국의 남성 노동력이 부족하자 전쟁에 필요한 석탄을 캐기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연행했다. 이렇게 동원 된 조선인은 약67만명, 주로 탄광과 시멘트 공장에서 일했고, 그 중 후쿠오카 지역에 약 20만명이 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연행 후 이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수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1만 여 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다른 지역에서 탄광노동을 하다가 숨진 조선인들까지 합치면 6만4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중에 일본 총리를 지낸 麻生 太郞 (아소다로 ;제92대 총리재임 2008.9.24.~ 09.9.16., 현,아베내각에서 재무상 재임중)의 증조부 아소 다키치(麻生太吉)는 일본 내에서 9개의 탄광을 소유했던 석탄재벌이었다.
아소광업(麻生鉱業)의 설립자인 아소 다키치(麻生太吉)는 정치권과의 유착을 바탕으로 큐슈의 광산왕으로 성장한다. 아소광업의 노동환경은 가혹하기로 악평이 높았고 이를 참다못한 광부들의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 대공황의 불황기에도 대자본과의 경쟁하면서 아소광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극심했던 노동착취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아소(麻生)탄광은 10,62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갱도에 몰아넣은 집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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