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시대의 여성정치참여
지방분권시대의 여성정치참여
남 일 재(南 日 再)
정치학 박사
동서대학교 교수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 소장
21세기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정치학회 이사
1. 여성정치참여의 문명사적 의미
여성의 사회참여확대는 이제 문명사적 대세로 자리잡아 가고있다. 20세기를 조직과 힘을 바탕으로 한 전쟁을 중심으로 하여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온 시대로 본다면, 21세기는 화해와 평화를 전제로 한 환경 친화적이며 복지 지향적인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보다 섬세하며 부드러운 감성과 뜨거운 사랑의 가슴을 지닌 여성에게 기대를 걸며 또한 사회적 역할을 확대해 간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부연한다면 남성이 독점적으로 이끌어온 과거의 사회가 치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한 이해관계에 따라 힘에 의한 패권주의적 사회였고 그러한 결과는 제국주의, 식민주의, 민족간 갈등과 전쟁, 강자와 가진 자에 의한 약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 극도의 이기주의에 의한 불신감의 극대화와 인간성의 상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 의한 국제적 국내적 긴장의 연속, 테러리즘과 보복의 악순환, 환경파괴와 지구촌의 위기 등으로 점철되어 온 것을 도저히 부인할 길이 없다. 남성들은 지구촌과 인류를 절망과 멸망의 공포 앞으로 몰아다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사회를 어떻게 끌어가야 미래의 후손들에게 제대로 되고 온전한 모습의 미래형 지구촌을 물려줄 수 있을까?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미래는 말할 것도 없이 전쟁과 테러가 없는 사회, 갈등과 테러 그리고 보복의 악순환이 없는 사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며 깨끗하고 향기나는 자연 속에서 사는 사회라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상을 한번 만들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 운영의 책임자를 한 번 바꾸어 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냉정한 이성적 계산만으로 엄청난 힘에 의한 강압적 질서를 계속해 온 남성이라는 주역을 잠깐 쉬게하고, 보다 감성적이며 직관적이고 또 삶 그 자체가 사랑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사회 운영을 맡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요즘 EQ의 시대가 왔다고 한다. 치밀한 이해관계에 의한 계산적인 두뇌(IQ)보다도 풍부한 정서를 바탕으로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 이해와 사랑을 나타내는 가슴(EQ)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제 여성이 그러한 문명사적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정교한 법칙에 따라 만물을 재단하는 자연과학의 세계마저도 이러한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양자물리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소립자의 세계에서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 어떤 계산과 법칙으로도 소립자들의 위치며 질량을 측정해 낼 수가 없고, 찾으면 찾을수록 아무 것도 없는 허공만 만나게 되는 이 소립자의 세계를 그 옛날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의 “허공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다”라는 시 한구절로 이해하려는 시도마저 나오고 있다. 치밀한 계산과 법칙보다도 더 상위 개념에 계산으로만 풀 수 없는 인간의 직관과 이해가 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그가 말하는 물리학에 있어서 불확정성의 원리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하물며 인간의 세계와 사회를 어찌 계산에 의해서, 그리고 힘의 논리로서 풀 수 있을 것인가? 한편의 시를 읊을 줄 알며, 꽃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가슴아픈 사연 한마디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줄 아는 사랑의 마음과 따뜻한 감정이 바로 인간의 삶 아닐까? 이런 것이 평화이며 복지이고 환경 아닐까?
차세대,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가진 자들이 지도자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개인적 야심과 가문의 영광, 눈꼽만큼도 안되는 권력에 눈이 멀어 세상을 온통 고통과 고뇌 그리고 부정과 부패로 물들게 만든 현재까지의 소위 지도자들과 차별화될 것이 아닌가? 남성들은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개인적 야심으로 가득 찬 존재들이다. 그리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냉정한 행동을 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20세기까지의 지구촌을 맡아오면서 어질러 놓은 것들을 이제 새로운 시각, 새로운 가슴,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여성들에 의해서 정리되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여성정치참여는 이렇게 엄청난 문명사적 요청을 받아들여야 하는 큰 전환점에서 생각하고 또 교육되어져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명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에 의한 판단력이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라는 점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이제는 뜨거운 가슴과 정열 그리고 사람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찬 그런 정치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2. 여성정치지도자의 성격과 사명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여성정치지도자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릴 중심에 서있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성지도자는 진보적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보란 보수와 대칭되는 말이다. 보수는 지킬 것은 지키자는 것이고 진보는 바꿀 것은 바꾸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여태껏 사회의 주역이었던 남성들은 기득권층이며 여성은 소외층이다. 기득권층은 돈, 권력, 명예를 다 가졌고 그래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 남성이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다르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남성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지킬 것도 없다. 그러면 한번 가져보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바꾸자고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진보할 것인가? 가장먼저 할 일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너무도 오랜 세월 남성중심주의 속에서 순치되고 길들여진 여성들은 남성들이 설정해 놓은 도그마에 묶여서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주체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여성지도자들은 이 껍질을 깨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혼연히 떠나야 하는 것이다.
굳이 헷세의 데미안을 인용하지 않아도 알을 깨는 아픔과 껍질을 벗어던질 용기를 여성들이 먼저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잘못된 관습, 인습, 습관으로부터 해방받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나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진보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여성지도자는 스스로 엘리트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엘리트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다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여성이 다 차세대지도자로 거듭날 수는 없다. 역사는 현명하고 용기있는 지도자와 그를 믿고 따르는 민중의 조화로서 형성되어진다. 여성지도자는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가 엘리트이며 지도자의 능력을 가졌다고 맏는 용기있는 자가 선점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기업 존슨앤 존슨의 회장을 지낸 일본인 아다라시 소멘은 지도자로서 성공하려면 4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라고 하였다. 첫째 언제나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둘째 언제나 운이 좋은 사람과 사귀라. 셋째, 인생의 멘토(스승)를 세명쯤 가지라. 넷째 1일 4식하라.(3식 + 독서/영혼의 양식) 여기서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곧 스스로 엘리트임을 인식한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정치지도자는 아주 개방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역사를 반추해 보면 중국인은 만리장성을 쌓았고 로마인은 사방으로 길을 뚫었다. 중국은 성 속에 갇혀서 살았고 로마인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외치면서 세계를 누볐다. 한 쪽은 벽 속에 갇힌 채 단절과 고립의 역사를 걸어왔고, 다른 쪽은 개방과 교류 그리고 관계형성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누가 세계를 제패했는가? 지도자로서 승리하려면 성을 쌓기보다 길을 뚫어야 한다. 구석구석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열어야 하고, 어떤 사상이나 이론과도 교류할 수 있는 지식의 길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여성정치지도자는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즉 엔터테인먼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재미있게 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삭막하고 각박한가? 그 동안의 남성지도자들이 재미있는 세상을 만들기보다는 아귀다툼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진정한 지도자는 멋을 알고 그 멋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유명한 정치가인 영국의 처칠은 유우머가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있는 국회는 싸움이 아니라 화기 넘치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떤 지독한 공격도 적절한 유우머로 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2차대전 중 그는 영국군은 1당 10의 능력을 가졌고 그래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데 싱가폴전투에서 영국군은 일본의 기습공격에 손 한번 못써보고 패하고 말았다. 영국 전체가 분노하였고 처칠은 의회에서 빗발치는 공격을 받았다. 엄청난 공격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는 “우리 영국군이 1당 10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11명씩 오는 것을 어쩌겠냐?”라는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이 한마디가 의회를 웃게 만들었고 영국인들의 분노를 잠재웠다. 지도자는 언제라도 즐거움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여유롭고 즐거움을 알 때 그를 따르는 민중도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는 깊이있는 사색과 엄청난 공부의 산물이다. 결코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다. 작은 것 하나라도 메모하면서 배울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기며 동시에 아무리 급박한 순간에도 유우머 한 토막 던짐으로서 세상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문명사적 과업이 여성정치지도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그 사명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는 대안있는 미래라는 말이 있다. 대안을 가지려면 먼저 현실을 낸정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반성과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문제를 바라보고 인식하고 정확한 눈과 판단력을 전제로 하며 그러한 능력은 분명한 목표의식과 더불어 논리적 펀더멘탈이 튼튼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꿈꾸는 진보주의자이면서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며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기보다 드넓은 세상으로 길을 열어 가는 지도자, 항상 자신을 운좋은 엘리트로 자신감을 보이면서 동시에 여유와 즐거움을 잊지 않는 지도자, 항상 사색하고 공부하면서 대안있는 미래를 설계하지만 그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지도자, 이런 모습이 바로 여성정치지도자인 것이다.